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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을 지나, 보스턴으로

보스턴 생활기 1편

by 윤슬

사막 같던 회사 생활


일을 쉬고 싶었지만, 그만둘 용기는 없었던 10년 차 직장인이었다. 어떻게든 잠시나마 벗어날 기회를 찾아 헤맸다. 그러던 차에 남편이 미국에서 좋은 자리를 제안받았고, 나도 휴직을 하여 함께 떠나기로 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직한 회사였다. 취직 준비 당시에는 직무가 나와 맞는지 깊이 고민하지 못했다. 한 번에 성공하지 못해 N번째 도전 중인 선배들의 후기를 읽으며 조급한 마음에 밀려 끌려갔다. 이것을 아는 지금도 다시 돌아가면 똑같이 행동할 것 같다. 취직을 앞두고 나는 실패가 몹시도 두려웠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지만, 그것은 실패가 한 차례에 그칠 때 이야기였다. 내게 실패는 실패의 늪으로 보였다. 한번 겪으면 점점 빠져들어가 다시 나오지 못하는 늪.


그렇게 들어간 회사는 내게 사막 같았다. 이번 프로젝트만 끝나면, 조금만 기다렸다가 승진하면, 저 자리로 옮기게 되면, 오아시스가 나올 것을 예고하는 표지인 줄로만 알았던 것은 신기루였고, 가도 가도 끝없는 목마른 모래 더미만 반복됐다.


워라밸을 생각해서 다른 것을 포기했지만, 그곳에는 만족할 만큼의 워라밸도 없었다. 포기한 것들을 생각하며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탓일 수도 있다. 주변 친구들이 받는 급여 수준이, 그들의 직장이 갖는 명예와 전문성이 솔직히 부러웠다.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만큼 피곤에 절어 있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를 자격지심이 대신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살폈다. 그렇게 오아시스만 찾아 헤매던 중, 남편이 미국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갈라진 목에 물이 천천히 스몄고 그제야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사막에 가본 적이 있다면, 그곳이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한지 알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 언덕의 장엄함과 높은 언덕에서 발을 헛디디여도 푹신하게 받쳐주는 모래의 자애로움, 그리고 세상에 별과 나만 남는 사막의 밤. 보스턴의 어느 따스한 오후, 나른하고 심심한 기분으로 생각했다. 나는 오아시스만 찾아 헤매느라 그런 것들은 놓쳤을지도 모른다. 사막일지라도 그 순간을 온전히 즐겼어야 했다는 후회가 남는다. 고인 물이라는 것이, 다른 말로 하면 실수해도 채팅거리가 될지언정 결국 다시 받아주는 자비였는지도 모른다. 월급은 적었으나 어느 새벽 전철이 끊겨 택시를 타고 퇴근한 적은 없었고, 회식에 끌려갈 때도 주최자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투덜거리며, 시답잖은 이야기로 별수 없이 웃다가 귀가할 때쯤에는 벌써?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분명히 사막인데 돌아보면 너무 춥거나 덥지는 않았고 옆에서 같이 걷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찌 됐든, 내 인생의 10년이 그곳에 있었다.



오아시스를 찾아, 미국행 결정


남편과 상의해 1년만 나갔다 오기로 했다. 나와 다르게 해외생활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가기로 결정한 이유에 시들어가는 내 모습이 적어도 남편의 커리어만큼 지분을 차지한 것 같아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결정되고 나서부터 출국까지 두 달이 남았다. 그 두 달 동안 나는 매일 반짝였다. 월요일 아침 출근길과 잦은 출장조차도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못했다.


그러나 미국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나는 대학 시절 다녀온 유럽 교환학생 수준을 막연히 떠올렸지만, 미국은 비자 절차부터 까다로웠다. 우선 비자 발급에 필요한 서류인 DS-2019를 회사에서 받아야 했고, 그다음에는 비자를 받기 위해 한국에서 인터뷰를 봐야 했다. 매 단계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에 남편과 나는 내내 초조했다. 서류 발급 시기가 다가오자 우리는 며칠 동안 새벽마다 메일을 확인하며 잠을 설치기도 했다. DS-2019가 발급되고 나서 비자 인터뷰를 신청하는 것도 치열했다. 3주 정도 뒤부터 인터뷰가 가능했고 결국 출국을 며칠 앞두고 간신히 인터뷰를 잡을 수 있었다.


준비하며 느낀 것은, 우리가 '슈퍼을'이라는 사실이었다. 제발 미국에 들여보내달라고 애걸복걸해야 했다. 한국에서는 서류 발급이 늦어지면 민원을 제기하지만 미국 문화는 약간 다른 것 같았다. 많은 것이 담당자의 재량에 달려 있었고 담당자 잘못으로 누락된 경우에도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눈치를 본다고 했다. 이민국의 특징일 수도 있지만 한국에서 행정 담당자로 일해봤기 때문에 부럽다고 생각했다. 물론 업무에 태만하거나 재량을 남용하면 안 되겠지만 미국의 담당자 반만큼이라도 재량이 있거나 민원으로부터 존중받을 수 있다면 직장생활이 많이 달랐을 것이다.



비자와 미국 입국 준비 과정


비자 인터뷰 후기를 많이 찾아봤는데 매섭게 질문받고 떨어진 사례도 많았다. 그래서 기출 질문들로 열심히 답변을 준비해서 갔다. 답변마다 여러 각도로 살펴보며 혹시 미국에서 오래 살 것 같은 의도로 비치지는 않는지 고민했다. 우리가 받는 비자는 연구를 위해 잠시 체류하는 목적이기 때문에 영주의 의도가 보이면 좋지 않다는 후기를 본 것이다. 미국에 사는 친인척을 언급했다가 떨어졌다든지, 영어 공부하러 간다고 했다가 영어를 너무 잘해서 떨어졌다는 사례들을 봤다. 물론 그 부분만이 떨어진 이유는 아닐 수 있겠지만 어쨌든 비자 목적에 부합하는 답변을 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인터뷰 당일 아침, 광화문 미국 영사관 앞에 일찍 줄을 섰다. 서둘렀지만 이미 건물 뒤편까지 줄이 이어져 있었다. 절차가 이렇게 까다로운데도 미국으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참 많다고 느꼈다. 여전히 기회의 땅인 걸까. 또는 한국에 더 이상 기회가 없는 것일까. 우리가 미국으로 간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애를 낳고 시민권을 받고 오라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했다. 타이밍이 맞으면 모르겠지만, 우리는 오랜 시간 있는 게 아니기도 했고 산모 건강관리도 걱정되는 부분이어서 미국에서 낳지는 않기로 했다. 물론 나중에 후회하는 것은 온전히 우리 몫이다.


트럼프 집권 이후 영주권 따기가 까다로워졌다. 그나마 미국 헌법상 비자 체류자들의 아이에 출생시민권을 부여하지 않겠다는 트럼프 행정명령은 중지된 상황이다. 지금 출생시민권을 따는 것이 마지막 미국 입성 기회인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지막이자 유일한 기회라는 생각이 사람을 초조하게 만든다. 나는 한국을 사랑하고 영원히 떠나는 것은 바라지 않지만, 어쩌면 아이는 여기서 상처입고 도망쳐야 하거나 또는 더 넓은 세상을 갈망할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에 미국에 있는 기간이 조금 더 길었다면 미국에서 출산을 했을 것 같다.


비자 인터뷰 직전까지 남편은 답변을 중얼중얼 거리며 연습했다. 한 주 전부터 나한테 갑자기 영어로 대화하자고 제안했지만 지켜지지는 않았다. 나는 마음이 편하면서 불편했다. 배우자는 그냥 짐짝 정도로 취급이 되어서 아무 질문도 받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혹시나 비자가 안 나오면, 나는 긁적이며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니 큰일이다. 그래서 내 역할은 남편을 혹독하게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인터뷰는 조금 허무하게 끝났다. 연구원으로 지원한 것이어서 그랬는지 질문도 많이 받지 않고 통과 됐다. 잘 지나갔으니 여유 있는 마음으로 하는 소리지만 준비한 답변을 하나도 보여주지 못해서 아쉬울 지경이었다. 인터뷰를 기다리면서 관찰한 결과 탈락을 많이 주는 영사가 있는 반면 우스갯소리도 하며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영사도 있었다. 후기에 왜 어떤 영사가 걸리기를 바랐다는 이야기들이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도 열심히 순서를 계산하며 편한 영사가 걸리기를 바랐다. 아쉽게도 가장 친절한 영사는 아니었지만, 무난한 영사를 만나 긴장을 조금 풀고 대답할 수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연구 분야가 무엇인지, 급여는 어디에서 받는지, 이렇게 기본적인 질문을 받고 바로 우리 여권을 가져가며 끝났다고 했다. 비자가 승인되면 여권을 가져가서 발행한 비자를 붙이고 몇일 뒤에 다시 돌려준다.


이제 비자가 나왔으니 남은 2주 동안 본격적으로 준비에 들어가야 했다. 용감하게도 오퍼레터를 받았을 때 이미 항공권을 끊었기 때문에 일단 급한 것은 집 계약이었다. 그동안 온라인으로 여러 집들을 둘러봤지만 렌트가 너무 비쌌기 때문에 비자가 나오기 전에 계약을 먼저 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도 먼저 집을 좀 찾아본 끝에 후보를 좁혀 놓았고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집을 찾을 때 주로 이용한 것은 미국의 직방인 Zillow였다. 처음에는 생전 처음 보는 지역에 수많은 전원주택과 아파트들이 펼쳐져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여러 집을 들락날락 한 끝에 어떤 감각을 얻었고 그때부터는 꽤 효율적으로 조건에 부합하는 집들 위주로 볼 수 있었다.


거주지역을 정할 때는 일차적으로 미국의 범죄통계지도를 참고하고 네이버 미국이주준비카페인 미준모에서 실거주자들이 위험하다고 이야기하는 곳을 정리해서 제외했다. 다음으로 후보를 고를 때 고려한 것은 시끄럽지 않은 주거지역에 있을 것, 누수나 방충 관련 관리가 어려울 수 있으니 오래되지 않았을 것 두 가지였다. 그러다 보니 전원주택보다 아파트 중에서 찾았고, 렌트비를 고려해서 남편 회사에서 약간 거리가 있는 동네의 신축 아파트들을 후보로 꼽게 되었다.


보스턴은 들고 나는 곳으로 보였다. 사람이 금방 들어오고 금방 나가는 곳. 대학 도시이기 때문에 늘 학생들이 있었고 남편처럼 짧은 기간 연구하러 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 부분은 슈퍼 자본주의 국가에서 바로 렌트비로 반영되었고 보스턴 중심부의 렌트비는 뉴욕이랑 비슷한 수준에 이르렀다. 우리는 더 교외로 나가는 대신 과감하게 차를 포기하고 전철로 출퇴근을 하기로 결정했다. 대부분의 아파트가 주차료를 월 50만 원 정도 부과하고 보험료가 천정부지로 뛰는 상황에서 우리 처지에 운전은 사치였다. 다행인 것은 다른 지역과 다르게 보스턴은 지하철이 잘 되어있는 편이었다.


렌트비를 감안해서 마음에 드는 아파트를 고른 뒤에도 계약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여러 차례 아파트 임대사무소와 연락을 주고받아 마음을 정해도 계약서를 쓰기 전에 집이 나가버리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아파트인 만큼 이웃 간 소음과 대마 냄새가 걱정되었는데 이 부분은 임대사무소에서 원격으로 집투어를 해준다고 해도 파악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급기야는 보스턴에 이미 살고 있는 남편 후배에게 직접 가서 집을 봐달라고 부탁했다. 에어비앤비에 묵으며 우리가 직접 집을 구하러 다닐 수도 있었지만 비앤비도 아주 비싼 데다 들고 가는 짐이 많았기 때문에 두 번 나르는 것도 부담이었다. 그렇게 한국인 눈으로 재차 확인한 뒤에야 집을 정했고, 한국 시간으로 새벽에 메일을 붙들고 허겁지겁 계약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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