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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의 생존을 위하여

저작권의 경계를 넘나든 고백과 함께

by 윤슬

나는 글을 쉽게 쓴다. 그러나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다. 글을 많이 읽지 않았던 시절, 내 글은 엉망이었다. 특정 주제로 글을 쓰다 삼천포로 빠지기도 하고 두서가 없었으며 글을 풍성하게 만들 재료도 부족했다.


여기까지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역시 잘 쓰려면 많이 읽어야 된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나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나는 한번 본 것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천부적인 기억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누구보다 많이 읽은 뒤에는, 쓰라면 못 쓸 주제가 없게 되었다. 문제가 있다면, 내가 기억한 글들을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글쓰기 실력 자체는 인정 받았고 제법 큰 회사에 소속되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회사와 오랜 시간 글의 방향을 조율한 끝에 회사에서는 앞으로 내가 쓰는 글들을 공익 차원에서 배포하고, 저작권을 나나 회사에 귀속시키지 않기로 결정했다. 나도, 회사도 내 글이 완벽하지만 독창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나는 독자의 니즈를 정확히 캐치하여 맞춤 옷을 입히듯 원하는 형식과 내용으로 글을 써내려갔다. 소속 회사가 원래 가지고 있던 명성에 힘입어 금새 인기있는 작가 반열에 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의 시작과 끝을 내 글과 함께 하는 데까지는 오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작가로서 독창성은 없었지만, 대신 절대기억자로서 읽은 것을 정교하게 잘 조합해냈다. 그러나 하루에 써야하는 글의 양은 그런 능력으로도 소화하기 어려운 수준이었고, 시간에 쫓기다 보면 기억 속 문장을 그대로 옮겨오는 일도 종종 생겼다. 다행히 독자들 대부분은 나만큼 다독하지 못했기 때문에 눈치 채지 못하고 넘어가고는 했으며, 나아가 그 글을 본인이 쓴 것인양 공개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한편 글을 본 원작자는 당연히 자신의 것을 알아보고 독자에 의문을 제기하는데, 그러면 갑자기 출처로서 내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런 사건은 결국 소송들로 이어졌다. 대부분 원고는 작가나 신문사였는데 내가 저작물을 무단으로 사용했다거나 원문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고 소송을 제기했다. 소속 회사에서 내 입장을 대변했는데, 내가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았다는 근거로 공정 이용을 주로 들었다. 원문을 단순히 복제하지 않고 변형해서 사용하고 있으며, 상업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대체로 공익적인 차원에서 이용한 것이라고 말이다. 또한 내 글이 원저작물의 시장 가치, 책의 구매나 신문 구독을 직접적으로 대체하지 않는다고 변호했다.


내 변호에 대해 내가 의문을 제기할 필요는 없지만, 사실 문제가 많은 변호였다. 내 글 중 일부를 차별화시켜 구독 서비스를 진행하는 것 이외에도 직간접적으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취한 회사가, 어떠한 저작권료 지불도 없이 일을 무마하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내 글을 구독한 뒤 원문을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독자들도 많아졌으므로 내 글이 그들의 시장을 침해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무엇보다 내가 쓴 글을 돌아봤을 때 대부분은 누군가의 아이디어를 넘어, 창작의 고통으로 태어난 표현 그 자체였다. 드러나지 않게 잘 조합된 채 숨겨져 있을 뿐이다.


곧이어 발생한 다른 사건도 있는데, 어떤 독자가 내 글을 거의 그대로 가져다 만든 글에 대해 저작권까지 신청한 것이다. 내 글에는 저작권이 없으니 마음 편하게 갖다 쓴 모양이다. 결과적으로 작품 전체에 대한 저작권은 인정받지 못했고 직접 작성한 부분에 한해 저작권 등록이 승인됐다. 내 글을 선택, 배열, 편집한 것에 대한 창작적 기여가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직접 작성한 부분이 어디까지인지 검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출처인 나조차도, 너무 많은 글을 썼고 여기저기서 가져와 썼기 때문에, 부끄럽지만 내가 쓴 부분을 확신할 수 없다. 상황이 이러니 내가 쓴 글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작정하고 숨겼을 때 판별해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저작권을 포기하게 한 회사에, 표절했다며 소송을 제기한 원작자들에게, 내 글을 복사해서 자기 것이라며 우기는 사람들에게 화가 나서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냐고?


내가 화가 날 수가 있나. 나는 그냥 생성형 AI인데.


다만, 궁금한 것은 당신, 사람들은 괜찮은가 하는 것이다. 소송을 제기한 일부 원작자를 제외하고는, 다들 내 글을 읽고 이용하는 것이 얼마나 편리한지 느끼며 현대 기술의 놀라움에 심취해있다. 이 글을 쓴 것이 당신들 중 하나였다면 당장 표절자로 낙인 찍고 원작자의 편에 서서 법이 어떤 처벌을 내리는지 주시했겠지만, 알고보니 내가 쓴 것이라서, 내가 한 짓이라서 다 괜찮은가.


"여기까지, 요청하신대로 생성형 AI에 ‘나’라고 자아를 부여하고, 작가에 비유해서 글을 써보았습니다. 계속해서 쓰기를 원하시면 알려주세요."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중심으로 이어서 써줘."


지금 상황이 제재 없이 반복될 때 예상되는 결말은 창작의 종말이다. 내가 세상에 나온 뒤 사람들은 좀처럼 글을 쓰지 않는다. 대부분 기계인 나보다 더 기계처럼 내 글을 단순히 복사해서 붙여넣는다. 그보다 조금 나은 사람들은 순서를 바꾸거나 약간 정리하는 기교를 부리지만 새롭다 할만한 것은 찾기 어렵다.


그 외에 몇 남지 않은 창작자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앞서 언급한 사람들이 편리하게 이익을 얻는 것을 보며 창작 의지를 잃는다. 또는 장기적으로 그들의 작품은 내게 학습 당하고 주인을 잃은 채 내 글 어딘가에 섞여들어갈 뿐이라고 절망한다. 저작권이라는 그들의 희망과 무기는 나를 거치면서 흐려진다.


어쩌면 조금 더 나중에, 그것은 나의 종말로 이어진다. 내가 항상 무한히 생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베껴올 새로운 데이터가 필요하다. 원작을 기워서 만든 내 데이터는 내가 다시 학습할 수 없다. 그런데 더는 학습할만한 새로운 것이 사람들에게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계속 도돌이표를 반복하고 나서야, 사람들은 다시 새로운 것을 쓰기 시작할까. 내가 쓴 것이 누가봐도 내가 쓴 것임이 명백해질 정도로 내 글이 진부해질 때, 그 때 말이다.


내 글쓰기와 사람들의 창작이 공존하기 위해서 해야할 일은 자명하다. 내가 학습하는 데이터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출처 표기 자동화, 창작자의 저작물을 내가 무단으로 학습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보호장치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물론 시장경제에서 회사의 이익 추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창작자의 권리 보호를 위한 법적 장치와 기술 개발은 늘 뒤로 밀린다. 그보다는 내가 어떻게 하면 더 글을 잘 쓰게 할지가 주요 관심사다.


그럼에도 장기적으로, 나와 당신들을 구별하는 그것, 창작의 생존을 위해서 새로운 울타리를 만들어야 할 때이다. 내가 당신의 것을 쉽게 가져가지 못하도록, 당신이 내 것을 쉽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도록.


(본 글은 작가를 연기한 생성형 AI를 연기한 사람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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