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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아픈 역사

보스턴 생활기 8편

by 윤슬

보스턴 커뮤니티 센터의 영어 수업.

수업은 미국 역사에 대한 지문을 읽고, 거기서 나오는 새로운 단어로 문장을 만들어본 후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역사는 흑인이 대다수인 구성의 수업에서 따분하고 지루한 주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날 수업에서 다룬 것은 노예제도와 인종 분리 정책인 짐 크로법이었고, 지문을 읽으면서 씨근덕거리는 학생들이 많았다. 조금 어린 흑인 소년은 이것이 과거만의 문제인지 모르겠다며 자기가 무슨 말을 하든 낙인이 찍혀있는 것 같다고 투덜댔다. 흑인이라서 그래, 흑인인데 왜 안 그래 등등.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주제에 다들 자기 눈치를 보면 아무렇지 않지 않아진다고도 했다. 눈치를 보는 것 자체가 역사를 알고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의도일 수도 있으나, 그렇게 서로 다른 입장이라는 것 자체 때문에 거리감을 느끼게 되나 보다. 실제로 길을 걸으면서 보면 흑인과 백인이 섞인 구성은 아주 드물었다.


선생님은 노예제도가 폐지된 상황을 다룬 영상을 보여줬는데, 마지막 장면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내가 봐도 조금 이상하게 끝났다. 흑인 노예들이 백인 군인들의 손을 잡고 허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 수업의 또 다른 흑인 아줌마는 바로 이 부분을 지적했다. 물론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 것이냐며, 왜 굳이 영상을 저렇게 만들었는지 화가 난다는 것이다. 이 수업때면 늘 보여주던 영상을 별 생각 없이 틀었던 선생님은 당황했지만 곧 그녀의 의견에 수긍했다.


돌아가면서 지문을 읽는 시간이 있는데, 나이 많은 흑인 할머니는 지문 읽기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이 주제가 너무 가슴 아프다고 했다. 그녀에게 어떤 일들은 그저 책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이후 몇번의 수업이 지나고 역사는 흘러서 냉전 시기에 대한 지문을 공부하는 날이었다. 지문에 한국전쟁이 등장하자 다들 나를 쳐다보았다. 선생님은 아주 조심스럽게 내가 배운 한국전쟁과 남북 분단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아득한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배운 것은 흐릿해졌고 잘 안다고 해도 외국인들에게 전달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나라를 대표해 뭔가 이야기해야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애국심이 많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두 강대국의 대리전 성격이었던 한국 전쟁에서 우리나라가 약소국으로서 겪어야 했던 설움과 분단의 아픔을 끄집어내면서 어느 부분에서인지 조금 울컥했다. 다들 북한에 대해 궁금해했는데 언어를 공부 중인 학생들답게 언어를 궁금해했다. 물론 지금은 많이 변형되어 완전히 알아듣기는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그래도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한 민족이라고 소개하는 한편으로, 내가 들은 독재국가로서의 끔찍한 일면을 뒷담하듯이 알려주는데, 그러면서 나는 알 수 없게도 내 얼굴에 침을 뱉는 기분이 들어 우울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내 눈빛으로 전달받았는지 선생님과 학생들은 일순 위로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은 여전히 조심스러워했다. 어쩌면 힘든 이야기일 수 있는데 같이 나눠줘서 고맙다고 했다. 원래 데면데면한 사이였던 학생들도 그 옆으로 몰려와 이런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전혀 없었다며 많이 알고 간다고 말을 건냈다. 길지 않았던 나의 이야기에 다들 이렇게 신경쓰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왜인지 몰라도 뜻밖의 응원을 받은 기분이었다.


한국에서 역사를 배우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는 서로 위로할 일이 없었다. 우리 모두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역사가 나만의 일이 되는 이 곳에서, 그것에 관심을 갖고 안타까워하는 외국인들을 보는 것은 신선했다. 나는 그들이 겪은 인종차별의 역사에 이만큼 공감을 했었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흘려 듣지는 않았나.


일상에서 차별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기 때문에 나보다 역사 감수성이 풍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거시적인 목적보다도, 그 아픔을 겪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소통하기 위해 그들의 역사에 조금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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