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생활기 7편
영어 실력을 늘리고자 방문한 보스턴의 커뮤니티 센터. 중세 유럽을 연상시키는 갈색 벽돌 건물에 위치해 있었다. 실제로 역사가 있는 건물 같았지만 내부는 리모델링을 했는지 아주 깨끗했다. 무료로 운영하는 공간들은 높은 확률로 노숙자들이 차지하게 된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이곳은 나와 같은 성인 학생들로 붐볐다. 놀라운 것은 내가 사는 동네에는 동양인들이 아주 많았지만 이곳에서는 동양인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흑인이나 라틴 계열이 대부분이었다.
레벨테스트는 읽기와 쓰기로만 진행되어서 예상외로 가장 높은 반에 배정되었다. 바로 그 주부터 수업에 나오면 된다는 안내를 받았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문제를 풀려고 여기 온 것이 아니라 영어로 말하기 연습을 하려고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영어를 너무 잘하는 학생들이 있는 반에서는 발표를 하거나 같이 대화를 하며 수업에 참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문제 풀기 본능은 넣어뒀어야 한다.
걱정은 다시 내려놓고, 용기 내어 첫 수업에 참석했다. 선생님은 내가 온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반갑게 인사했다. 무료 수업인데도 체계적으로 진행되는 것 같았다. ㄷ자 형태로 놓인 책상들에 나랑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어른 학생들 8명 정도가 앉아 있었고 각자 대충 만들어진 이름 팻말을 앞에 하나씩 두고 있었다.
선생님은 바쁘게 내 팻말도 만들어서 앞에 놓아주었고 인사를 하라고 시켰다. 이건 몰랐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만나서 반갑다고 웅얼거렸고 다른 학생들은 반가운지 안 반가운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 클래스 구성도 마찬가지로 흑인 반, 라틴계 반이었다. 그리고 슬픈 소식은 대부분 영어가 모국어였고 아주 잘했다.
첫날은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백수라서 늘어져있다가 오랜만에 긴장하고 앉아있어서인지 수업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쯤에는 목과 허리가 아팠다. 수업은 선생님이 지목해서 말하기를 시키는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대답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받은 한국식 교육과는 너무도 다른 것임을 실감했다. 손을 들 필요도 없었다. 다들 혼잣말을 크게 하는 느낌으로 대답했다. 심지어 질문하지 않았을 때도 수업 중간에 모르는 것이 있으면 학생이 갑자기 혼잣말처럼 말을 꺼냈다. 그러면 선생님은 수업을 멈추고 그 이야기를 듣고 다 같이 생각해 보자고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선생님이 수업 주제에 대해 뭔가 가르치는 것은 별로 없었다. 선생님은 진행자 역할을 담담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내 입에서는 대답도 질문도 좀처럼 튀어나오지 않았다. 답을 알 때도 생각의 문을 한번 더 거치는 동안 이미 다른 누군가 대답했다. 이런 발표문화의 차이 때문에 한국에서 교육받은 아이들이 적응하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직접 겪으니 그것은 생각보다 더 큰 벽이었다.
초중고 교육에서 느낀 것은, 발표를 열심히 하면, 어지간히 사교성이 좋지 않은 이상 나댄다는 표현으로 놀림받기 쉽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반대로 혼자 벙어리처럼 있으니 초라한 바보,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기분이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겠지만 수업을 반복할수록 내가 좀 달라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라떼와는 발표문화가 많이 달라졌다고 들어서 다행이다. 세상에 부딪치려면 그때부터 연습하는 것이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 알든 모르든 소리 높여 대답하는 외국인들에게 발표는, 내가 안다는 것을 알리는 것 보다도 근본적인, 존재를 확인하는 수단이다.
물론 꼭 필요한 말과 정답만 말하고자 하는, 또는 정답을 알아도 겸손하게 사양하는 문화도 장점은 있다. 이런 문화에서 하는 회의는 상대적으로 옆길로 덜 새고, 효율적이며 생산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그런 문화에 나 정도로 취해있으면 안 될 것 같다. 뭔가 안다고 해도, 내가 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면, 아니 나라는 존재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면, 앎의 의미가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