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버스 정류장은 전쟁터를 연상케 한다. 사람들은 서로를 밀치며 달린다. 지하철 플랫폼은 발 디딜 틈이 없다. 개찰구 앞에서는 작은 몸싸움이 일어나고,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진다. 전동차 문이 열린다. 몸은 인파에 떠밀려 들어간다. 가방끈이 어깨를 파고든다. 숨이 조여 온다. 누군가의 발이 밟혀 웅성거림이 귀에 스친다. 손잡이를 잡을 필요가 없는 콩나물 시루를 연상케 한다. 도시의 러시아워의 일상이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모니터에는 알림창이 번쩍인다. 책상 위에는 서류가 탁하고 떨어진다. “오늘까지 처리해.” 건조한 목소리가 귀에 박힌다. 전화벨은 끊임없이 울린다. 자판 소리는 총알처럼 사방으로 튄다. 프린터에서는 서류가 쉼 없이 뱉어진다. 사무실 공기는 묵직하다.
퇴근길 지하철 안은 고단함이 스며든다. 사람들의 얼굴은 저녁의 무게를 안고 있다. 서로의 어깨가 닿은 채로 버티고 서 있지만, 위태로워 보인다. 손잡이를 잡은 손은 휘청거리고, 잠에 못 이겨 고개는 이리저리 흔들린다. 객차 안에는 피로가 내려앉아, 한 치의 공간조차 정적처럼 무겁다.
집에 도착해도 안식은 없다. 거실 소파 위엔 개켜야 할 빨래가 산처럼 쌓여 있고, 방 안에는 벗어놓은 옷가지들이 흩어져 있다. 싱크대엔 설거지가 그득 차, 손길을 재촉한다. 하루를 돌이켜볼 틈도 없이 다시 집안일에 몸이 묶인다. 눈을 붙이기도 전에 내일의 치열함이 그림자처럼 다가온다. 아침이 두렵다.
내 아침은 다르다. 알람이 아닌 햇살이 나를 깨운다. 커튼 사이로 들어온 빛이 바닥에 길게 누워 있다. 창문을 열자, 바람이 커튼을 밀치고 들어와 방안을 한 바퀴 돌고 나간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추억을 데려온다. 토스터에 구워지는 빵 냄새가 커피 향을 불러온다. 아침은 그렇게 천천히 열린다.
아침 일을 마치고 나면 하루는 온전히 내 소유가 된다. 빨래를 널면 피죤 향이 바람을 타고 춤추고, 내 마음은 먼지를 털고 상쾌함으로 향한다. 화단의 화초들이 눈에 들어온다. 한때는 사랑을 주지 못해 잎이 시들고 줄기가 축 늘어졌지만, 지금은 화초의 잎맥이 햇살을 머금어 반짝이고, 꽃망울이 조심스레 터지려 한다. 나는 그 앞에 잠시 머물러 숨을 고른다. 화초의 생명력이 나를 일깨운다.
봄이 오면 햇마늘 향이 먼저 부엌을 채운다. 껍질을 벗기면 알싸함이 손끝에 스며든다. 마늘을 유리병에 차곡차곡 담고, 간장과 식초를 붓는다. 간장이 스며들며 마늘은 서서히 익어간다. 6월이 되면 초록빛 매실이 통통하게 영근다. 꼭지를 떼고, 설탕과 번갈아 담는다. 시간이 흐르면 매실이 숨을 내쉬듯 즙이 올라오고, 집안은 봄바람이 매실 향을 싣고 와 평온하다.
여름, 시장 한 모퉁이에 초록빛 청귤이 수북하다. 풋풋한 향이 코끝을 간질이고, 손끝에 맺힌 푸른 기운이 마음을 흔든다. 집으로 데려와 청귤을 얇게 저며 설탕과 함께 유리병에 차곡차곡 눌러 담는다. 시간이 흐르면 설탕은 과육의 신맛을 덜어내고, 향긋한 즙이 병 속에 차오른다. 겨울이 오면 청귤청은 가족의 비타민이고 사랑이다. 여름의 기운은 그렇게 다가온다.
가을 끝자락, 시장길을 걷다 보면 동글동글 예쁜 무가 널려 있다. 단단한 무를 고르고, 무청을 더해 소금에 절인다. 마늘과 파, 생강, 고추씨를 면포에 넣어 단단히 묶고, 재료가 떠오르지 않게 꾹 눌러 육수를 붓는다. 맑은 국물 위로 기포가 톡톡 오르며 작은 숨결이 살아난다. 동치미는 가족의 소화제다. 가을은 그렇게 겨울을 준비한다.
마지막으로, 겨울을 품는 김장에 들어간다. 배추를 켜켜이 쌓고, 잎을 펼쳐 소를 정성껏 넣는다. 부엌 한켠에서 수육이 보글보글 끓고, 고소한 냄새가 시장기를 돋군다. 김장이 끝나면 가족이 둘러앉는다. 갓 버무린 김치를 찢어 수육을 감싸 한입 넣는다. 따뜻한 온기가 입안을 채우고, 알싸한 맛이 혀를 깨운다. 피곤했던 몸은 어느새 풀리고, 웃음소리와 이야기꽃이 식탁 위로 피어난다. 겨울의 준비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도시는 늘 분주하다. 빠른 속도에 맞춰 숨 가쁘게 달려야만 살아남는 것 같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맞벌이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 되어 버렸다. 나는 주부로 사는 자리에 서 있다. 누군가에겐 뒤처짐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내겐 가장 큰 자유이자 감사의 이름이다. 내 손끝에서 계절의 맛이 태어난다. 내가 만든 삶의 맛을 매일 새로 담근다.
나는 눈치 볼 필요도 없고, 주눅들 이유도 없다. 장독대 앞에 다시 선다. 햇살은 따듯하고 바람은 상쾌하다. 이곳이 내 사무실이고 이 집이 내 회사다. 주부인 나는 사장이자 직원이고, 평가자이자 주인이다. 내 아침은 다르다. 내 삶은 나의 방식으로 흘러간다. 내일은 또 어떤 맛을 담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