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뚝이-내 가슴에서 밀어낸 이름

by 윤슬

어린 시절, 나는 작은 장난감에 눈길을 빼앗겼다. 손끝이 닿자, 몸체가 기울더니 곧장 일어섰다. ‘툭‘하고 치니 넘어졌다가 우뚝 서고 또 넘어졌다가 우뚝 섰다. 쓰러짐조차 허락하지 않는 몸짓. 그 단순한 움직임이 내 마음을 붙들었다.

그 장난감은 오뚝이였다. 아기가 그것을 툭툭 치며 까르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 웃음은 곁에 있는 모두를 기쁨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 순간, 내 안에 다짐이 자리했다. 언젠가 내가 지쳐 포기하고 싶을 때, 오뚝이를 떠올리리라. 그리고 내 마음속 깊이 오뚝이를 담았다.

집은 늘 고요했다. 새벽이면 문틈으로 흙냄새가 스며들었고, 엄마는 논밭으로 향했다. 나를 흔들어 깨우며 “다시 자면 학교 못 간다. 아침 먹고 잘 다녀와”하고 등을 보였다. 발자국 소리가 대문 밖으로 멀어질 때쯤, 나는 이불속에 몸을 파묻었다. 언니와 오빠들은 모두 집을 떠났고, 혼자 남은 나는 준비물도, 하루의 결정도 스스로 챙겨야 했다. 엄마의 무거운 어깨를 보며, 작은 투정조차 꺼내지 못했다.

중학교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장학금이 내 생존 방식이었다. 칠판에 분필이 긁히는 소리, 책상 위에 내려앉는 햇살, 교실 한쪽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나는 그 모든 것을 등지고 문제집을 붙잡았다. 저녁이 되면 창밖은 붉게 물들었고, 내 펜 끝은 늦은 밤까지 달렸다. 장학금으로 수업료가 충당됐다는 소식에 기쁨보다 먼저 밀려온 것은 안도의 숨이었다. 쓰러지지 않고 계속 달려야 했다. 나는 오뚝이였다. 그 다짐은 고등학교 시절에도 대학 시절에도 다르지 않았다.

고향을 떠나 광주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좁은 자취방에는 퀴퀴한 이불 냄새와 라면 국물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밥을 굶는 날이 많았고, 주말이면 시험공부와 집안 살림을 하느라 지쳤다. 그래도 오뚝이를 생각하며 잘 견뎌냈다. 도서관 창가는 형광등 불빛이 하얗게 번졌고, 종이 냄새와 먼지 섞인 공기가 폐 속 깊숙이 스며들었다. 시계의 초침이 멎은 듯 더디게 흘렀다.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는 타인의 세계였고, 손끝에 남은 펜 자국만이 나의 현실이었다.

결혼 후에도 삶은 바뀌지 않았다. 가난한 집안에 시집가 시부모의 생활비를 도맡았다. 출퇴근길 전철 안, 인파로 가득 차 숨결이 뒤엉켰다. 늘 치열한 경쟁 같았다. 회사에 도착해 내 자리에 앉으면, 비로소 안도의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손안에 따끈한 커피 향이 더해지면 그날은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하루였다. 그 작은 위안이 나를 지탱했고, 나는 오뚝이의 응원으로 씩씩하게 일어섰다. 그때는 그랬다.

남편의 사업이 무너졌을 때, 나는 또다시 몸을 일으켜야 했다. 아이들의 등록금, 식탁 위 밥그릇, 모두 내 어깨에 얹혔다. 나는 서둘러 새벽밥을 준비해 아이들을 챙겼고, 이른 아침 도로를 달리며 시계와 겨루듯 큰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낮부터 밤늦도록 과외를 이어갔다. 고단했지만, 그 시간이 나를 붙잡아 주는 끈이었고 나의 자존감을 붙잡아 준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뚝이로 살아야 했다.

저녁이면 연기에 그을린 냄비에서 된장찌개 냄새가 피어올랐다. 냄새의 구수함으로 위로받고, 나는 아이들 앞에서 웃음을 지었다. 가족은 내 고단함을 모른 척했다. 도리어 나의 철저함이 불편하다고 불평했다. 가슴속에 덩어리가 앉아 있는 듯 먹먹했다. 그래도 또다시 몸을 일으켰다. 오뚝이의 몸짓은 버릇처럼 이어졌다.

내 엄마를 생각한다.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홀로 5남매를 키운 사람. 어깨가 무너질 때, 엄마는 어떻게 삶을 이어갔을까. 힘든 표정도, 힘들다는 말도 끝내 하지 않았다. 엄마의 가슴속에도 나처럼 커다란 오뚝이가 있었을까.

엄마는 평생 씩씩했다. 자그마한 체구에서 어떻게 그리 큰 힘이 솟아났을까. 여름 태풍에 쓰러진 벼를 일으키느라 손톱은 흙탕물로 물들었고 손등은 불어 터져 있었다. 겨울 새벽, 숨이 흰 김으로 얼어붙는 시간에도 엄마는 찬물에 손을 담가 이불을 빨았다. 물에 젖은 손끝은 붉게 갈라졌고, 굳은살은 두텁게 배어 있었다.

내 도시락은 늘 정갈했다. 맛도 좋았다. 뚜껑을 여는 순간, 참기름 향이 퍼지면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난 도시락을 끝까지 비운 적이 없었다. 내 엄마는 모든 면에서 능숙했다. 하루는 늘 모자랐다. 밤늦은 자습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골목 어귀에서 손전등 불빛이 흔들렸다. 적막한 공기 속에서, 그 작은 빛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초저녁잠이 많은 엄마였지만, 그 빛은 언제나 나를 향한 기다림이었다.

병상에 누워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희미한 숨결 사이로, “밥은 먹었니, 애들은 잘 지내니.” 그것이 엄마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엄마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나는 엄마보다 더 고생했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엄마야말로 내 앞에서 늘 더 큰 오뚝이였다. 이제는 엄마도 오뚝이를 내려놓고 평온한 곳에서, 온전히 당신만의 삶을 살기를 희망한다.

나는 오뚝이였다. 장학금으로 학비를 감당한 소녀였고, 생활비를 짊어진 며느리였으며, 아이들의 학비를 버틴 엄마였다. 그 모든 세월 속에서 나는 오뚝이를 철학으로 삼고 살았다. 이제는 내 가슴에서 오뚝이를 밀어내고 싶다. 나는 더 이상 오뚝이가 되고 싶지 않다. 넘어질 때마다 일어섰던 몸짓은 더 이상 용기가 아니라 족쇄였다.

희생은 한 가닥의 빛조차 남기지 않았다. 남은 것은 쇠약하게 닳아버린 몸과 아직 덜 마른 마음뿐이었다. 쓰러져도 괜찮을까. 멈춰 있어도 괜찮을까. 나는 아직 답을 알지 못한다. 단지 나로 우뚝 서고 싶다. 오뚝이가 아닌 내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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