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건의 경고, 늦은 외교-생존을 넘어, 존엄을 묻다

by 윤슬

“월급 500만 원.”

한 줄의 문장이 한 사람을 낯선 땅으로 이끌었다. 그 문구는 결국 생명을 앗아갔다. 취업이라는 말 뒤에 숨어 있던 함정은, 우리 사회가 오래전부터 쌓아온 욕망의 잔재였다.

올해 8월까지 캄보디아에서 한국인 납치·감금 신고는 330건에 달한다. 그러나 외교부의 첫 안전 경보는 9월 16일에야 발령됐다. (매일경제, 2025.10.14) 뒤늦은 조치, 늘 반복되는 변명. ‘총동원 대응’이라는 말은 이미 희생 뒤의 선언이었다.

부산경찰청은 이달 초, 가족이 “감금된 것 같다”며 신고한 사건 두 건을 조사 중이지만, 캄보디아 현지 수사는 여전히 늦고 느슨하다. 이제 국민은 묻는다. 국가는 제때 국민을 지킬 의지가 있었는가.

숨진 박모(22) 씨는 7월 17일 “전시회 참석”을 이유로 캄보디아로 떠났다. 그를 유인한 이는 같은 대학 선배였다. 그가 사망한 채 발견된 곳은 보코르산 인근의 차량 안이었다. 현지 경찰은 사인을 ‘고문에 의한 심정지’로 추정했다. 국내외 범죄조직이 점조직 형태로 구직자들을 모집하고, 입국 즉시 여권을 빼앗은 뒤 보이스피싱, 온라인 사기에 강제 투입한다. 거부하면 폭행과 협박이 뒤따른다. 단 한 번의 클릭, 한 줄의 문구가 인생을 낚아채는 시대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 비극이 예견된 사회의 결과라는 점이다. 학교는 인문학 대신 경쟁을 가르치고, 사회는 사유보다 스펙을 평가한다. 청년들은 안정된 직장, 대기업 취업, ‘스펙’이라는 단어에 묶여 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은 자존심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생명’은 부차적인 가치가 되었다. 우리가 청년을 “이기는 인간”으로만 키운 대가가 지금 그들의 죽음으로 돌아온 건 아닐까.

외교부는 이번 사태를 ‘현지 수사 협력 강화’로 설명했다. 그러나 늑장 대응은 매번 반복된다. 국가가 구직자를 해외로 내보낼 때, 그들을 보호할 시스템과 책임은 함께 내보냈는가. 정보의 불균형, 무책임한 구조, 느슨한 감시. 이것이 사람을 함정으로 떠민 또 하나의 범죄다. 문제는 ‘취업 사기’가 아니라 ‘삶의 조건’이다. 일할 곳이 없고, 믿을 제도도 없으며, 꿈은 있지만 방향을 잃은 이들이 많다.

정부는 보여주기식 안전 대책이 아니라, 삶의 안전망을 설계해야 한다. 특히 주식 배당금 제도는 검토할 만하다. 국민연금이 연령에 따라 지급되는 구조라면, 주식 배당금은 일정 금액을 꾸준히 돌려받는 생활형 수익으로 세대 구분 없이 생활비에 보탬이 될 수 있다. 단순한 금융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삶’을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사회 안전망이다.

말은 언제나 유혹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책임 없는 말은 생명을 앗아간다. 우리는 “기회”라는 말에 속은 사람을 잃었다. 그 말의 함정을 메우는 일, 그건 지금 살아 있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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