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과 생존 사이

by 윤슬

친구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 조문을 갔다. 장례식장 한편, 삼삼오오 모여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코인 투자’에 열중하고 있었다. 화면엔 ‘코인 차트’가 요동치고 있었다. 당황스러웠고,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곧 그 장면이 이 시대의 절박함을 말해준다는 걸 깨달았다.

장례 문화는 분명 달라졌다. 내가 열 살이던 해, 아버지를 떠나보냈던 날이 떠오른다. 늦가을, 낙엽이 가득한 마당. 어른들의 곡소리가 골목까지 퍼졌고, 굽은 허리로 제사 음식을 준비하던 동네 어르신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때의 장례는 슬픔을 숨기지 않았다. 감정은 드러났고, 가족은 그것을 온전히 껴안았다.

지금은 다르다. 장례식장은 전문화되었고, 절차는 간결하고 효율적이다. 음식은 외주에 맡기고, 곡은 사라졌다. 감정은 짧은 눈빛과 말로 전해지고, 사람들은 빠르게 자리를 뜬다. 변화는 현실적인 선택이다. 유족의 고통을 줄이고, 조문객의 부담을 덜어준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불가피하게 생겨난 모습이다.

산업의 구조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AI는 일자리를 대체하고, 전통적인 직업은 무너지고 있다. 안정된 고용이 사라진 시대, 젊은 세대는 생존을 위해 재테크를 택한다. 그들에게 코인 차트는 단순한 수익의 문제가 아니다. 살아남기 위한 현실의 맥박이다. “왜 하필 장례식장에서…”라는 의문보다, “그만큼 절박하는구나”라는 이해가 앞섰다.

나 역시 그 시선을 안다. 아이들 대학 시절, 본업 외에도 투잡을 했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주식과 코인 흐름을 좇았다. 숫자에 매달린 시간은 얼굴에 주름을 새기고 마음에 말 없는 상처를 남겼다. 옆에 앉은 후배가 물었다. “언니, 왜 그리 안 예뻐졌어요?” 나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맞아.” 그 한마디에, 무엇을 포기하고 살아왔는지가 담겨 있었다.

지나고 보면 인생은 소풍처럼 가벼운 설렘으로 채워도 좋았던 시간이었다. 자본이 전부는 아니었는데, 나는 그것만이 정답인 듯이 좇았다. 생존에 쫓겨 내일의 햇살을 놓쳤고, 한때만 누릴 수 있었던 계절들을 흘려보냈다. 놓쳐버린 시간들이 내 안에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 아쉬움을 뒤로하고, 문득 생각한다. 지금의 청춘들은 이 시간을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오늘의 젊은 세대를 향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나는 그들을 통해 나를 본다. 불안한 시대 속에서 삶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그들은 오늘도 차트를 손에 쥐고 버틴다. 장례식장에서 마주한 그 풍경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 지금 시대의 또렷한 얼굴이었다. 코인 차트는 차갑고 무감각한 것이 아니라, 간절함의 다른 이름이었다. 몰상식이 아니라, 이 시대가 그들에게 강요한 생존의 방식이었다.

어른이란, 충고보다 이해를 먼저 건넬 수 있는 사람이다. 절박함 앞에서는 조용히 곁에 서는 것, 그것이 진짜 어른의 역할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제 그 풍경 앞에서 놀라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들에게 속삭이고 싶다. “그래도 너는 잘 살아내고 있어.”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이 달라졌듯, 그 의미를 받아들이는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 과거엔 곡소리와 상복, 밤샘 지킴으로 슬픔을 표현했다면, 지금은 조용한 인사와 눈빛 속에 마음을 담는다. 표현은 달라졌지만, 애도의 깊이는 여전하다. 이는 단절이 아닌 전환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애도를 침묵의 언어로 이해해야 한다. 말 없는 위로, 바쁜 발걸음 속의 짧은 인사, 스마트폰 너머 생계의 무게조차도 누군가에겐 삶을 버텨내는 진실한 방식일 수 있다. 낯설더라도,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는 말로 단정할 수 없다. 시대는 변했고,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슬픔을 품는다. 다름을 인정하고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날 장례식장에서 나는 배웠다.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과 ‘삶을 버티는 방식’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한쪽은 슬픔이고, 다른 한쪽은 생존이지만, 결국 모두 인간을 지키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슬픔과 생존 사이, 우리는 각자의 이유로 침묵을 안고 살아간다.

삶은 계속된다. 각자의 언어로, 각자의 속도로. 때로는 휴대폰 너머 숫자 안에 말 없는 생존의 울음이 숨어 있다. 그 울음을 듣는 일, 그것이야말로 진짜 어른의 귀다. 판단을 멈추고, 조용히 곁에 서는 일. 말 없는 이해. 나는 이제 그런 어른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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