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엮는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헤어진다. 기억에 남지 않는 스침이 있는가 하면, 몇몇은 계절처럼 깊고 진하게 스며든다. 봄날의 벚꽃처럼 짧게 반짝였다가 흩어지는 인연, 여름 폭우처럼 격정적이지만 금세 사라지는 관계. 어떤 이는 조용히 다가와 긴 침묵을 나누고, 어떤 이는 끝내 이름조차 남기지 않는다. 나 또한 그런 흐름 속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또 조용히 떠나보내는 일을 반복해 왔다.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진짜 친구는 많지 않다. 한때의 웃음과 다정이 믿음을 주었지만, 시간은 무심하게도 서로의 방향을 달리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내 안에 여전히 살아 있고, 그리움이 밀려와 그와 어울리는 노래를 흥얼거리게도 한다. 그 기억들이 내 삶을 지탱해 주는 힘이 된다.
친구란…… 삶의 언저리마다 조용히 동행하는 편안함이다. 슬픔의 길목에서 조용히 어깨를 내어주고, 기쁨의 절정에서 함께 웃어주는 사람. 계절이 몇 번 바뀌어도 온기를 잃지 않는 마음, 그런 고요한 다정함이 내게는 친구였다. 그 존재 하나만으로도 삶은 덜 고되고, 하루는 조금 더 따뜻해진다.
친구란...... 성이 같을 필요도 없고, 또래일 이유는 더더욱 없다. 누군가는 나보다 훨씬 젊은 이었고, 또 누군가는 삶을 더 오래 걸어온 이였다. 나이를 뛰어넘는 이해, 삶의 결이 맞닿는 순간 우리는 친구가 된다. 그것은 설명이 아니라, 순간의 침묵 속에서 다가오는 직감이다. 가족이 의무로 곁에 있다면, 친구는 선택으로 머무는 사람이다. 그 선택은 대개 삶의 가장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에 이뤄진다. 감춘 아픔을 들키고도 등을 돌리지 않는 사람, 구겨진 마음을 함께 펴보려 애쓰는 사람. 좋은 날보다 힘든 날에 더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 나는 그런 이들을 ‘친구’라 부르고 싶다.
나는 친구를 가을에 비유한다. 가을은 모든 계절을 지나 도달하는 성숙의 시간이다. 화려하지 않아도 담백하고, 뜨겁지 않아도 오래 남는다. 낙엽이 쓸쓸히 떨어지는 풍경 속에서도, 우리는 오히려 낭만을 나누며 추억을 더한다. 때론 침묵 속에서도 들리지 않는 마음이 오가기도 한다. 침묵이 오히려 다정일 수 있다는 걸, 진짜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된다.
진짜 친구는 또 다른 나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이. 내가 잊고 지나친 표정과, 미처 꺼내지 못한 말들을 기억해 주는 이, 그가 건넨 한마디, 마음속 깊이 접어둔 편지 한 장,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 보낸 순간마저 어느 날 문득 나를 일으켜 세운다. 나를 다시 살아 낼 수 있게 하는 존재, 가슴 속의 나다.
친구는 기억이다. 내 목소리, 말투, 삶의 태도까지 오래도록 기억해 주는 이. 한동안 잊고 지내다, 문득 스쳐 가는 바람이나 낯선 골목의 풍경 하나에도 불쑥 떠오르는 이. 그와 만든 이야기, 함께 웃던 장면들, 시간이 지나도 흐려지지 않는 존재, 잊으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온기. 늘 추억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그 기억이 오늘을 따뜻함으로 채운다.
삶은 언제나 만만치 않다. 수없이 많은 얼굴을 마주하고, 그만큼 많은 이별을 겪으며, 우리는 아주 조금씩 단단해진다. 그 과정에서 끝내 남는 사람, 말보다 마음으로 닿는 사람, 그런 친구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위로받는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 나는 친구라는 이름을 다시 꺼내 들었다. 삶의 언저리마다 조용히 동행하는 편안함, 슬픔의 길목에서 함께하며 토닥여 주는 손길, 기쁨의 절정에서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미소, 사계절의 흐름 속에서도 온기를 잃지 않는 마음, 그런 고요한 다정함이 있는 친구....... 그 존재 하나로도 삶은 덜 외롭고, 가끔은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가을날, 이 친구와 낙엽 위를 나란히 걸을 수 있기를. 그저 그 요요한(蕭蕭) 낙엽 소리 속에서 서로의 온기를 조용히 느낄 수 있기를, 나는 소망해 본다. 그리고 오늘, 나는 너에게 그 말을 전하고 싶다. “나에겐, 네가 그런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