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 전통의 이탈과 1950년대

마츠모토 세이초, “모래그릇”

by yoonshun

일본의 작곡가 타케미츠 토오루(武満徹, 1930-1996)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영화나 드라마로 여러 차례 제작되었던 『모래그릇』의 원작소설(砂の器, 1961)을 읽으면서부터였다. 마츠모토 세이초(松本清張, 1909-1992)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 소설의 중심인물은 와가 에이료(和賀英良)라는 스물 여덟살 청년 음악가로 설정되어 있다. 그와 함께 젊은 소설가, 평론가, 화가, 저널리스트, 극작가 등이 모여 결성했다고 설정된 ‘누보 그룹(ヌーボー・グループ)’이라는 단체는 1950년대 실제 일본에서 활동하던 전위 예술가들 중심의 모임 ‘실험공방(実験工房)’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


당시 20대의 젊은 타케미츠 토오루도 바로 이 ‘실험공방’의 주요 구성원으로 활약했다. 2차대전 직후 미군 점령기를 거친 일본에서는 기성 지식인들에 대한 반발과 전통에 대한 거부를 드러내는 예술활동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타케미츠가 기록한 제도권 음악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나, 당시의 음악이 대중에게서 고립되고 있다는 인식 역시 (실제 그의 음악이 이런 문제의식의 대안이 되었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당대의 분위기를 심도 있게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1967년 뉴욕필하모닉 창립 125주년 기념으로 의뢰받아 초연된 그의 대표작 "November Steps" 창작 노트에서는 그가 동시대 미국인 음악가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와 교류하며 얻은 감상들도 함께 찾아볼 수 있다.


이후 일본에서 수십 년에 걸쳐 드라마와 영화로 여러 차례 제작된 ”모래그릇“에서는 주인공 와가 에이료의 직업을 주로 (유사) 클래식 지휘자나 피아니스트, 작곡가로 묘사하고 있지만, 소설의 설정만으로도 타케미츠를 떠올리게 하는 와가 에이료의 ‘전공’분야는 다름아닌 ‘전자음악’이다. 나아가 그의 전자음악은 이 작품의 ‘추리소설’로서의 정체성을 극대화하는 단서로도 중요한 장치가 된다. 그저 ’천재 음악가‘라는 설정만을 살려둔 채 전자음악이라는 중심 소재를 배제한 영화와 드라마의 각색과 전개가 (천재 음악가라면서 왜 저런 음악을?, 이라는 의문을 던지고 싶을만큼) 다소 엉뚱하게 느껴졌던 이유이기도 하다.


서양음악의 전통과 관습을 학습하고 수용하기 시작한 지 한 세기도 지나지 않은 시점의 일본에서, 오랜 전통과 관습을 파괴하려는 동시대 서구의 경향마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은 얼핏 모순처럼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타케미츠와 존 케이지의 이름을 알고 그들의 글을 읽으면서도 정작 그들의 음악을 (심지어 그 유명한 ’4분 33초‘ 마저도) 기꺼이 찾아 듣게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한때의 일명 ’전위음악‘을 결코 드라마나 영화의 전면에 내세울 수 없는 이유 역시 결국에는 그런 맥락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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