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여성 피아노 연주자의 존재감과 정체성

무라카미 하루키, “오자와 세이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

by yoonshun

小澤征爾. 村上春樹, 『小澤征爾さんと、音楽について話をする』, 新潮社, 2011.


무라카미 하루키(1949-)의 ”노르웨이의 숲(ノルウェイの森, 1987)“을 관통하는 주요 배경 중 하나인 요양소阿美寮에 장기 거주하던 38세 여성 ’레이코レイコ(石田玲子)‘는 젊은 시절 콘서트 피아니스트를 꿈꾸던 음대생이었다. 독일 유학을 목표로 콩쿠르를 준비하던 중 갑작스럽게 마주한 당시의 신체적 정신적 좌절의 순간을 (소설 속 표현 그대로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드처럼‘) 너무도 상세하게 회상하는 레이코는. 결국 피아노 한 대 없는 요양소에서 꾸준히 기타를 연습하며 (스스로를 ’인간 주크박스‘라고 칭할만큼) 바흐부터 비틀즈에 이르는 폭넓은 레퍼토리를 마치 배경음악처럼 내내 연주하며 삶을 이어간다. 60년대 후반으로 설정된 소설 속 시대 배경을 고려하면, 레이코는 대략 쇼와 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1930년 무렵 태어났을 것이다.


이처럼 클래식 음악을 포함하는 다수의 서구 음악들을 작품 속에 담아내며 영향력을 과시해 온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 속 ’레이코‘의 또래에 해당하는)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1935-2024)와 함께 음악을 들으며 진행한 여러 편의 대화 기록은 (그들이 의도했든 아니든) 서구화 이후 근대 일본의 클래식 음악 인식을 압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오자와 선생 본인이 지휘한 오케스트라 연주 실황을 비롯한 여러 장의 준비된 (주로 LP) 음반들을 구간별로 뜯어?가며 오가는 문답들은 어떻게 보면 ’음악‘이기보다는 ’음향‘과 ’음반‘, ‘녹음’에 관한, 또 그것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에 치중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이 제도권의 인터뷰 상황에서는 결코 말할 기회가 없었거나 말하지 않을 것 같은 이슈들을 (간식도 먹고 농담도 주고 받으며) 캐주얼하게 나누는 장면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록이 남아있다니, 독자의 입장에서는 행운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미국과 캐나다, 서유럽의 주요 도시 오케스트라와 수백년에 이르는 클래식 음악 레퍼토리를 두루 아우르며 이어가는 두 거장의 대화 속에서 문득 “노르웨이 숲”의 레이코를 떠올려 본다. 레이코는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일본 여성 교육의 필수 과정으로 정착해 온 ’서양음악‘을, 그 중에서도 상징적인 악기인 ’피아노‘를 집중적으로 학습했던 주변의 ’흔한‘ 음대 출신 ‘중년’ 여성이다.



소설의 1인칭 주인공 못지 않게 (편지글을 포함해) 대사?의 비중도 높고, (스스로 또는 지병으로 생을 마감하는 다수의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드물게’ 끝까지 살아남는 캐릭터임에도, 이 책의 독자들 중에는 ‘흔한 여성’인 레이코를 인상적으로 기억하거나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는 거의 없어보인다. 굳이 언급하기도 새삼스럽지만 오자와 선생과 하루키쌤의 대화 속에 오가는 수많은 지휘자와 연주자들은 극히 몇 명의 예외 말고는 대부분 (아내와 자녀들을 둔) 남성들이다.



매거진의 이전글피아노라는 악기의 재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