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서양 오페라 수용과 ‘나비부인’

노다메 칸타빌레 (3)

by yoonshun

二ノ宮知子, 『のだめカンタービレ 25』, 講談社, 2010.

吉本明光, 『三浦環: お蝶夫人』, 日本圖書センタ-, 1997. (초판: 1947).


모두 스물 다섯 권의 노다메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두 권은 “오페라 지휘에도 도전하고 싶다”는 치아키의 바람대로 대학 친구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오케스트라와 함께 도쿄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Die Zauberflöte, K. 620, 1791)를 상연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음악만큼이나 대본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오페라의 특성상, 각각의 배역들이 노래 부르는 장면과 함께 일본어로 번역된 가사들이 각 장면의 말풍선들을 가득 채운다.


만화 속 일본 청년들의 진지한 오페라 연습 장면들을 보면서 문득 떠오른 인물은 바로 미우라 타마키(三浦環, 1884-1946)이다. 열 여섯 살이던 1900년(메이지 33년) 도쿄음악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제국극장 소속의 오페라 가수로 활약했던 그는 1913년 결혼(재혼)한 남편의 베를린유학에 동행했는데, 다음 해 1차대전 발발로 인해 런던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1915년 런던에서 처음으로 ‘나비부인’ 역할을 맡아 무대에 섰고, 이후 1935년까지 약 20년 간 미국과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무려 2천 회에 걸쳐 ’나비부인’에 출연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 작품 대본의 일본어 번역도 미우라 본인이 직접 작업했다고 한다.



사후 출간된 회고록의 제목을 비롯해 ‘나비부인’은 곧 미우라 타마키의 또다른 이름이나 마찬가지였다. (회고록에 따르면 미우라를 직접 만난 말년의 푸치니는 “무대 위의 미우라 부인은 내가 상상하던 바로 그 나비부인의 모습”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 1937년 5월 18일자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정식 상연된 오페라 역시 미우라 타마키의 “나비부인”이었다. 기사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반도 최초의 오페라 ‘나비부인’ (전막) 공연 : 본사 후원 26, 7 이틀 밤, 부민관, 미우라 타마키(三浦環), 김영길, 이하 40명 동원, 반주에는 중앙교향악단이 출연”. 기사의 본문에는 “마담 버터플라이 역은 일본이 낳은 세계적 프리마 돈나로 범 2천여 회를 무대 위에서 이 마담 버터 플라이를 노래했다는 미우라 타마키 여사”라는 설명이 이어진다. “반주의 도쿄중앙교향악단과 합창단 40여명과 ‘미우라 타마키’ 여사 일행은 굉장한 도구를 가득 싣고 26일 오후 1시 28분 경성역 착 ‘노소미’로 입성할” 것이라고 예고한다.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가 마흔 중반 무렵 발표한 오페라 “나비부인(Madama Butterfly, 1904)”의 창작 경위나 배경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내용들이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에서 굳이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미우라 타마키를 비롯해 당시 이제 막 서양음악을 학습하기 시작한 동아시아의 여성 성악가들에게 서양 오페라 속의 ‘일본인’ 역할이 대단한 기회로 여겨졌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까지도 미국이나 유럽에서 한중일 출신의 소프라노 가수가 초초상 배역으로 데뷔하거나 무대에 서는 사례를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와이대 교수 요시하라 마리의 분석에 따르면 “나비부인”이 서양인 관점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한편으로 당시의 일본인 엘리트들이 ‘오페라’라는 서구의 전통 예술 형식의 권위를 배경으로 적절히 만들어진 일본인의 이미지를 서양인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었다는 데 긍정적으로 반응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アジア人」はいかにしてクラシック音楽家になったのか?人種・ジェンダー・文化資本、2013。) 21세기 초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는 노다메와 친구들이 ‘탈일본’을 통해 서양인들에게 끊임없이 보여주고 싶어하던 ‘일본인’으로서의 어떤 모습들이 겹쳐 보이는 부분들이기도 하다.




음대생 노다메와 친구들이 서양음악사 시험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졸음과 지루함으로 괴로워하는 모습만 보더라도, 실기시험이나 콩쿠르를 앞두고 연주 연습을 할 때와는 너무도 대조적인 것처럼,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거나 감상하는데 ‘역사’를 엮는 것 자체를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정서는 언제나 흔하지만, 적어도 ‘비서양인’으로서 우리에게 어떤 관점의 ‘서양음악사’가 유효하고 필요한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탐색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막연한 질문을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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