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20세기 일본 고도 성장기 카라얀의 선택
小澤征爾, 『ボクの音楽武者修行』, 新潮文庫, 2002. (초판 1962).
小松潔, 『カラヤンと日本人』, 日本経済新聞出版 , 2008.
1950년 이후 일본의 클래식 음악 전개에서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1908-1989)은, 지휘자라는 범주를 넘어서는 하나의 거대한 브랜드이자 아이콘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2008년 출간된 “카라얀과 일본인”이라는 제목의 책이 닛케이(일본경제신문)출판사에서 출간되었고, 저자가 음악 연구자나 음악 관계 종사자가 아닌, 90년대와 2천년대 두 차례 베를린 특파원을 지낸 닛케이(일본경제신문) 기자, (자칭 ‘카라얀 오타쿠’라는) 코마츠 키요시(1958-)라는 사실만으로도, ‘카라얀’과 ‘일본’을 엮는 상징적인 키워드는 무엇보다도 ‘경제’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책이 출간된 2008년은 카라얀 탄생 백주년에 해당하는 해였다.)
아직 본격적인 스타급 지휘자로 올라서기 이전의 카라얀이 처음으로 일본을 공식 방문한 시기는 1954년이다. 일본 최초의 전문 오케스트라이자 대표적인 관제 오케스트라인 NHK교향악단(N향)에서 사무장 직에 있던 아리마 다이고로(有馬大五郎, 1900-1980)가 주도한 기획으로, 카라얀은 N향을 지도/지휘하며 일본 주요 도시를 투어했고, 이후 카라얀은 세상을 떠나는 1989년까지 30여 년 간 모두 열 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일본 공연을 진행했다. (1954년은 나치집권기 베를린 필을 전담하던 지휘자 푸르트뱅글러(Wilhelm Furtwängler, 1886-1954)가 세상을 떠난 해이기도 하다.)
(경제신문사에서 출간된 책인만큼) “카라얀과 일본인”에서 특히 부각되는 주제는 고도성장기 일본의 주요 대기업을 이끌던 경영진들과 카라얀의 교류와 거래?이다. 새로운 레코딩 기술이 급격히 발전해 가던 1950-60년대, 대규모 음반 시장으로 자리잡은 일본은 ‘레코딩 스타’이기도 했던 카라얀 전성기 활동의 주요 거점이 되었는데, 특히 70년대 일본 방문시에는 도이치 그라모폰과 영국EMI이 일본법인을 통해 각각 별도의 일정으로 카라얀 기자회견을 실시했을 정도로 일본 내 카라얀 레코드의 위상은 다른 뮤지션들의 활동과는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입지에 있었다. 별도의 수식어 없이 그를 향한 일본인들의 호칭이 그저 ‘제왕帝王’으로 통한다는 사실 역시 이러한 맥락을 뒷받침한다.
한편으로 그 배경에는 야마하, 산토리, 소니 등 일본 대기업과의 적극적인 교류가 있었는데, 빈 필의 무대 연주를 위한 ‘아이다 트럼펫’ 같은 전용 악기를 개발하고 제작해 “(야마하는) 오토바이도 좋지만 악기도 좋다”는 카라얀의 명언?으로 인정?받은 야마하를 비롯해, 1980년대 중반 산토리홀 설계 과정에서 카라얀과 당시 사장이던 사지 케이조(佐治敬三, 1919-1999)와의 대화가 공연장 구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일화에 더해, 소니의 사장 오가 노리오(大賀典雄, 1930-2011)는 무려 1989년 카라얀의 자택에서 그의 임종을 지켰을 정도로 친분이 깊었다고 한다.
카라얀이 일본에 발을 들였던 1950년대, 일본에서 지휘자 수업 중이던 20대의 오자와 세이지는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1867-1957)가 이끌던 “NBC심포니”의 연주 실황을 들으면서, “일본에 남아있으면 안되겠다”는 위기감에 1959년 파리로 떠났고, 그 해 프랑스의 브장송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본격적인 지휘 활동을 시작했다. (오자와는 당시 토호 음악학교 동창생이자 일본 최대의 부동산 개발기업인 미츠이 부동산 사장의 딸이었던 피아니스트 에도 교코(江戸京子, 1937-2024)의 주선으로 고베에서 출발하는 프랑스행 화물선에 ‘특별 승객’으로 탑승해 필리핀에서 싱가포르, 인도, 아프리카 대륙의 수에즈 운하를 거쳐 지중해로, 이집트를 지나 시칠리아 섬으로, 결국 프랑스의 마르세유 항에 도착하기까지 2개월 넘는 여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오자와는 이후 베를린에서 일종의 오디션 과정을 거쳐 카라얀의 지도를 받게 되는데, 이 시기 카라얀이 일본에서 얻기 시작한 인기를 감안하면, 두 사람의 만남이 교차하는 시점이 의미있어 보이는 한편, 카라얀의 일본 활동이 N향의 주선으로 시작되었던 데 비해, N향과 그렇게 좋은 인연이 되지 못했던 오자와의 이력은 두 사람의 엇갈린 행보를 드러내는 단면이기도 하다. 일찍이 유럽 활동의 도전과 정착 과정을 (기합이 한껏 들어간) “무사 수행”으로 규정했던 오자와의 젊은 시절 기록은 또한 20세기 후반 동서양의 ‘지휘자’ 정체성에 대한 여러가지 질문들을 이어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