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베를린의 일본인 지휘자

코노에 히데마로와 일본 최초의 전문 오케스트라

by yoonshun

大野芳, 『近衛秀麿 - 日本のオーケストラをつくった男』, 講談社、2006.


1889년 제정된 대일본제국헌법이 기본적으로 프로이센(독일제국) 헌법을 바탕으로 틀을 갖추면서, 근대 일본의 서구화 과정에는 19세기 말 독일의 여러 제도들이 긴밀하게 반영되었다. 제국대학을 비롯해 사범학교와 군인학교 등에서는 독일어에 능숙한 엘리트들이 양성되었고, 일본의 다이쇼 시대(1912-1926)의 교양이란 곧 독일문화와 독일식 사고에 기반한 것이었다. 1900년대에 접어들며 독일에 체류하는 일본인의 수도 점차 늘게 되었고,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1919-1933) 일본인들에게 '학문의 도시'로 여겨지던 베를린에는 대규모 일본인 커뮤니티가 구성되어 있었다. (加藤 哲郎, 『ワイマ-ル期ベルリンの日本人: 洋行知識人の反帝ネットワ-ク』, 岩波書店, 2008.)


비슷한 시기 베를린에는 아직 20대 중반의 젊은 일본인 지휘자 코노에 히데마로(近衛 秀麿, 1898-1973)도 있었다. 1924년(다이쇼 13년) 그가 베를린 필의 연주를 지휘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물론 공식 연주회는 아니고, 히데마로의 개인 비용으로 대관하고 기획한 소규모 공연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는 1922년 취임한 푸르트뱅글러(Wilhelm Furtwängler, 1886-1954)였다. 이후 나치가 집권을 시작한 1933년부터 1940년까지 코노에는 베를린 필에서 모두 여섯 차례의 정기연주회를 지휘했다. (1943년 안익태의 베를린 필 지휘 이력과도 연관되어 논쟁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


천황가의 친척에 속하는 코노에 집안은 메이지 유신 이후 신설된 '화족' 제도에 따라 작위를 받아 '공작' 가문이 되었다. 히데마로의 이복 형제 후미마로(近衛文麿, 1891-1945)는 전시체제 일본의 총리였던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귀족원 원장을 지낸 이들의 아버지(近衛篤麿, 1863-1904)는 이후 화족 자제들의 학교였던 가쿠슈인 원장직에 취임하기도 했다. 당시 이 가문의 저택에는 마흔 명에 가까운 고용인(이른바 '하인')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히데마로의 전기를 집필한 작가 오노 카오루(大野 芳, 1941-2022)는 '일본 최초의 위대한 지휘자가 너무 오랫동안 잊혀져 왔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다소 과장된 듯한 주관적 찬사를 이어간다. 물론 근대 일본 클래식 음악 수용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특징들인 화족, 독일, 오케스트라, 전쟁 등과 같은 면면들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헌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많은 도움을 얻기도 했지만, 본문을 읽다 보면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구체적인 근거없이 극적 재미나 인물의 찬양?을 위해 각색한 듯한 내용들도 왠지 신경이 쓰인다.


한편으로 코노에 히데마로가 연주자나 작곡가 경력 없이 곧바로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음악가의 길에 들어섰다는 점도 주목해 볼 부분이다. 부유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정식 학교 교육도 거치지 않았지만, 그는 오직 막대한 자산을 배경으로 유럽에 건너가 유명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현지에서 대량으로 악보를 구입해 일본에서 사실상 최초의 (오늘날 NHK교향악단의 전신으로 여겨지는) 전문 오케스트라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히데마로의 (어떤 면에서 당황스럽기도 한) 독특한 이력은 19세기 말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정체성을 얻게 되는 '지휘자'라는 역할의 성장에 맞물려 있다. 영상매체 시대에 접어든 이후로는 무대 위에서 일종의 '배우'와 같은 스타성도 지휘자들에게는 필수적인 가치가 된 듯하다. 히데마로의 전기에 내내 '위대함'을 강조하는 어조가 이어지는 것도 그저 우연은 아닐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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