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인 극작가와 프랑스인 피아니스트의 모국어-외국어

사무엘 베케트와 엘렌 그리모의 같은 듯 다른 프랑스어-영어

by yoonshun

Samuel Beckett, “Waiting For Godot / En Attendant Godot: tragicomedy in 2 acts, (a bilingual edition), translated from the original French text by the author, Grove Press New York, 2010. (프랑스어 원작 1952, 영어 번역 1954, 1982)


David Serero, “Between The Notes: The Hélène Grimaud Piano Documentary”, 2023.


프랑스 출신의 피아니스트 엘렌 그리모(1969-)가 수시로 인용하는 폭넓은 서구 문학 범주에서 자주 거론되는 작가들 중에는 사무엘 베케트(1906-1989)를 빼놓을 수 없다. 미국에 정착해 영어로 활동하는 비중이 높음에도, 서른 이후부터 여러 권 출간된 그리모의 저작들은 모두 프랑스어로 집필되었고, 그 안에서 언급되는 레퍼런스들도 당연히 프랑스어권의 문학과 번역본들이다. 그리모가 인용하는 베케트의 작품 역시 프랑스어 문장들로 접할 수 있다.


아일랜드 출신의 사무엘 베케트는 대표작인 “고도를 기다리며”를 비롯한 다수의 작품을 모국어인 영어 대신 프랑스어로 집필했다. 1952년 프랑스에서 첫 출간된 “고도를 기다리며”는 이후 작가 본인의 번역으로 영국과 미국에서 각각 출간되었다. 지난 2010년 뉴욕에서 출간된 해당 작품의 프랑스-영어 대역본 서문에서 베케트 연구의 권위자인 미국인 영문학자 곤타르스키(S.E.Gontarski, 1942-)는 두 언어 사이의 대조 뿐 아니라, 베케트가 고심하며 여러 차례 수정을 거친 영국 영어와 미국 영어 사이의 간격을 최소화 한 결과물임을 강조한다.


모국어 대신 외국어로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베케트는 “특정한 문체style 없이도” 글을 쓰기에 더 수월하다는 장점을 제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베케트의 고향인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임상과학자 겸 문학연구자 오브라이언(Eoin O'Brien, 1939-)은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프랑스어 대본에 담겨 있는 특정한 대사나 배경, 관습 등에서 “뚜렷한 아일랜드 특징unmistakedly Irish”들을 찾아낸다. 나아가 그는 영어판에 수록되어 결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성서 구절들이나 일부 은유적 표현들이 프랑스어판에는 빠져 있거나 변형돼 있는 사례들도 꽤 있다고 지적한다.


중부 유럽의 남성 연주자들이 여전히 강세를 이루던 1980년대 중반, 아직 스무살도 되지 않은 ‘프랑스인 여학생’으로 데뷔한 (게다가 파리 중심의 프랑스 음악계에서 드문 ‘남부’ 출신의) 엘렌 그리모는 줄곧 이른바 ‘업계’의 관행이나 기대치를 벗어나는 레퍼토리와 무대 매너로 전세계의 청취자와 관객들을 만났다. 이후 투어 연주자로 약 30년 이상 활약해 온 그의 인간적, 전문적 면모에 두루 (주로 영어로) 주목하는 다큐 “Between The Notes (2024)”에는 음악을 매개로 프랑스어-영어를 매개로 (언어 뿐 아니라) 여러 문화권에 걸친 그리모의 스케일을 확인할 수 있다.


캐나다의 프랑스어권 도시 몬트리올 출신의 지휘자,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휘자, 웨일즈어가 모국어인 영국인 오페라 가수, 라디오 프로그램 제작자이기도 한 프랑스인 음악학자 등 엘렌 그리모와 긴밀하게 협업해 온 동료들은 출신만큼이나 연령대의 폭도 넓다. 프리젠터 겸 연출자로 다큐를 이끌어가는 데이비드 세레로(David Serero, 1981-) 역시 파리 출신의 모로코계 유대인으로 지난 2020년에는 유네스코에서 선정한 다양성Diversity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본업은 바리톤 오페라 가수이다.) 이런 배경에서 엘렌 그리모에 관한 솔직하고 유쾌한 이야기들을 전하는 동료들이지만, 그럼에도 결국은 입을 모아 말한다. “She is really french!!”


동아시아인의 관점에서는 흔히 ’서구’ ‘서양인’ ‘영어권’ ‘프랑스어권’ 같은 식으로 외래 문화의 범주들을 적당히 규정하게 된다. 그러나 모국을 떠나 ‘이중’ ‘다중’ 언어를 구사하며 지내며 코스모폴리탄 또는 세계시민(Citizen of the World) 같은 표현으로 수식된다 하더라도, 타고난 출신과 정체성을 임의로 숨기거나 버리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유명인들의 생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규정하기 위해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주제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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