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대, 1920년대생, 두 일본인의 너무 다른 길

가토 신로와 미시마 유키오가 선택한 평화와 전쟁

by yoonshun

加藤信朗, 『平和なる共生の世界秩序を求めて- 政治哲学の原点』, 知泉書館, 2013.


三島由紀夫, 『太陽と鉄・私の遍歴時代』, 中公文庫 新装版, 2020. (초판 太陽と鉄(1968) 私の遍歴時代 (1964))


철학자 가토 신로(1926- )는 1950년 도쿄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했다. 전시체제에 접어든 1940년대 초 아직 중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그는 미군의 공습이 시작되던 시기 남태평양 마샬 군도에서 해군 군의로 복무하던 큰형의 전사 소식을 듣는다. 전후 반 세기 이상 대학의 철학과 교수로, 서구 고전 철학의 정신을 바탕으로 일본 근대의 과제들을 탐구해 왔던 그는, 2013년 “평화로운 공생의 세계질서”를 구현하기 위한 ‘정치철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들을 모아 출간했다. 이미 그의 나이 80세를 앞둔 시기였다.


이미 2천년 이상 전부터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했던 ‘좋은 국가’를 구현하기 위한 전제로 ‘철학’이 갖는 위상과 가치에 주목하는 가토 신로는, 서구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근대 일본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철학’이라는 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접근한 사례를 지난 백 년 동안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말로 떠드는 敎說에 그치지 않는, 인간에게 무엇이 중요한지에 관한 지속적 ‘탐구’가 바로 ‘철학’이라는 그의 주장에 따르면, ‘철학자’는 이런저런 현안들에 대해 발언하는 ‘사상가’나 ‘지식인’과도 구별되는 존재여야 한다.


가토 신로의 ’평화로운 공생’을 향한 염원의 정반대편에서 군국주의와 천황제 찬양에 목소리를 높였던 미시마 유키오(1925-1970)는 가토 신로와 거의 동년배이다. 전시체제가 정점을 향하던 1944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법률학과에 입학해 독일법을 전공했던 그는 1947년 제국대학이 도쿄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한 직후 졸업했다. 비슷한 시기 서구문화와 사상에 영향을 받고 (전공이 다르기는 했지만) 도쿄(제국)대학에 다녔던 두 사람이 이렇게 다른 길을 가게 된 배경?에 대한 단순한? 의문으로, 미시마가 서른 후반 기록한 일종의 자서전 “나의 편력시대”를 찾아보다가, 해당 글이 수록된 문고판 후반부의 “미시마 유키오 최후의 말三島由紀夫最後の言葉”도 읽어보게 되었다.


“최후의 말”은 평론가 후루바야시 타카시(古林尚, 1927-1998)가 미시마의 자택에서 진행한 대담의 녹취록으로, 대화가 이루어진 시기는 1970년 11월 마흔 다섯 살의 미시마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불과 1주일 전이었다고 한다.


(지면을 가득 채운 미시마의 과격한 어휘와 문장들의 한편으로, 문득 그보다 한 세대 앞선 일본인 그림책 작가 야시마 타로(八島太郎, 1908-1994)의 프로필이 떠올랐다. “1939년 반군국주의 활동으로 일본에서 살 수 없게 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작년 10월 일본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1957-)가 발표한 ‘전후 80년’ 메시지에는 “1937년 언론통제 강화로 정책비판이 봉쇄되고, 전쟁을 적극 지지하는 논조만이 국민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다”며 언론의 전쟁 책임을 지적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1920년대에도 일본의 대외 팽창에 비판적이던 주류 언론의 태도가 만주사변(1931)을 전후해 “장사가 된다売れた”는 이유로 적극적 전쟁지지로 전환했던 순간을 상세히 언급한 것이다.

전쟁을 반성하기 위해, 평화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여든이 다 된 철학자 정도 되어야, 또는 은퇴를 앞둔 총리 정도 되어야, 이 정도나마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일까. 젊음과 건강미를 앞세워 전쟁과 죽음을 논하며 인기를 누린 (여전히 누리고 있는?) 미시마의 거침없는 기록들에 밀려드는 두려움의 한편으로… ‘좋은 삶’을 위해 ‘스스로를 해명하기 위한 탐구’를 강조한 가토 선생의 문장들을 다시금 새겨본다.

매거진의 이전글아일랜드인 극작가와 프랑스인 피아니스트의 모국어-외국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