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인정받지 못하는 외로움
아프거나 고통받고 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엄살이나 부리는 거짓말쟁이 취급을 받을 때 고통은 가중된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을 때 감격해서 우는 환자들이 있다. 아무리 지독한 병명일지라도 누군가 내 아픔을 알아주고 인정해 준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이다. 고통을 아무리 호소해도 반응해주지 않는 환경에서 오래 혼자 견딘 사람에게 진단이라는 인정은 소중하다. 고통 자체보다 이해받지 못하는 외로움이 더 더 아프다.
아이가 처음 배가 아프다고 말했을 때, 아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기껏해야 가벼운 장염 정도일 거라 여기며 동네 병원으로 향했다. 길이 막혀 어쩔 수 없었다며 늦게 출근한 의사가 아무래도 충수염인 것 같다며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바로 큰 병원으로 가 초음파 검사를 받았지만, 충수염 대신 장막간림프절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그 병은 충수염과 증상은 비슷하지만, 아무런 치료 없이도 가만 두면 낫는 가벼운 병이라고 했다. 아이는 이틀 동안 계속 아픔을 호소했지만, 장막간림프절염이라는 진단 때문에 아이의 아픔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다음 날 오후쯤이나 다른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볼까 생각하고 예약 문의를 하다 당장 응급실에 가라는 말을 들었다. 응급실에서 CT를 찍은 후 충수염 진단을 받았고, 아이는 한밤중에 중국 로컬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혼잣말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박주영 판사가 울산에서 발생한 3인 자살미수사건의 판결문 말미에 썼던 문장이다. 아내의 말을 자꾸 흘려들었던 것이 아내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었을까 반성하며 적어두었던 메모에서 옮겨 적은 문장이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혼잣말을 해본 사람은 안다. 혼잣말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결혼 이후 나는 단 한 번도 힘든 적이 없다. 고통의 주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힘들다는 말을 꺼내기라도 하면 언제나 나보다 더 힘든 남편을 생각하라는 말을 들었다. 모든 고통과 비극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남편이었다. 가정 경제가 어려워졌을 때도, 집을 떠나 기약 없이 떠돌아다녀야 했을 때도, 상실의 슬픔이 밀려와도, 심지어 내 몸이 아파도 가장 힘든 건 언제나 남편일 뿐 나일 수 없었다.
이 잔인한 이야기의 가장 슬픈 점은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는 사실이다. 남편은 내게 혼잣말하라고 내버려 둔 적이 없다. 말을 하지 않은 건 나다. 심지어 누군가 내게 식물인간이 되라는 저주를 퍼부었을 때조차 남편에게 이야기하지 못했다. 남편은 항상 나보다 큰 책임을 맡고 있고, 나보다 힘든 사람이니까 말할 수 없었다.
충수염 진단을 받고 곧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이는 걱정하거나 놀라는 모습 대신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확실한 진단을 받기 전 아픈 배를 쥐고 아이가 얼마나 검색을 많이 했는지 안다. 자신의 아픔을 설명해 줄 진단명을 찾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장막 림프절염이라고 진단받았을 때는 아이의 아픔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나 역시 충수염 진단을 받고야 아이가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했다. 아프다는 아이의 말보다 의사의 진단을 더 신뢰했던 걸 후회했다. 타인의 고통은 오직 머리로만 짐작할 수 있는 영역이기에 더욱 섬세하게 듣고 살피는 기술이 필요하다.
수술 후 회복을 위해 병실에 누워 있는 아이에게 말했다.
자꾸 괜찮다고 하지 마.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실은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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