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 시간에 겪은 최악의 경험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던 체육이 들은 날이면, 나는 아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누군가는 체육이 머리를 안 써도 되는 시간이라 좋아하는데, 몸을 잘 쓰지 못하는 나는 체육 시간이면 머리가 뜨거워졌다.
그날의 과제는 뜀틀 넘기였다. "다 할 수 있지?" 선생님은 어떻게 뜀틀을 넘어야 하는지 설명해 주지도 않고, 시범 한 번 보이지 않았다. 내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선생님은 맨 앞줄부터 아이들을 불러냈다. 맨 앞의 아이가 출발했다. 순식간에 뜀틀을 넘었다. 내 눈에는 이미 착지한 아이의 여유로운 동작만 보였다.
"자 봤지? 이렇게 하는 거다."
아무리 머리를 써 봐도 선생님이 말하는 그 '이렇게'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다음 아이가 달려 나갔다. 뜀틀을 넘었다. 앞의 아이가 뜀틀 위에 뛰어오르는 순간 다음 아이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 아이도 뜀틀을 넘었다. 다음 아이도, 그다음 아이도 모두 훌쩍 잘도 넘었다.
드디어 내 차례. 머리는 아까보다 뜨겁고 심장은 터질 듯이 뛴다. 앞에 섰던 아이가 여유 있게 뜀틀을 넘었다.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뜀틀이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속력을 줄였다. 구름판을 밟고 뜀틀 위에 두 손을 올렸다. 껑충 뛰어 보았지만, 뜀틀을 넘기는커녕 다리를 벌려보지도 못하고 두 발이 구름판 위로 떨어졌다. 잠깐 뛰어올랐을 때 온몸이 앞으로 쏟아져 금방이라도 얼굴을 땅에 처박을 것처럼 두려웠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뜀틀을 넘지 못한 아이들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한 사람도 남지 않을 때까지 반복한다."
달린다. 손으로 뜀틀 위를 짚는다. 앞을 보며 다리를 벌린다. 착지. 이 간단한 동작을 하지 못한 머저리 다섯 명이 한 명씩 달려 나갔다. 나는 줄 맨 끝에 서서 달려 나가고 또 달려 나갔다. 아무리 다시 도전해도 뜀틀 앞에만 서면 커다란 벽에 막힌 듯 넘어갈 수 없었다. 뜀틀을 손으로 짚고 발만 구르다 돌아왔다. 얼굴은 점점 더 뜨거워져 새빨갛게 되었다.
머저리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다. 마지막 둘이 남았다. 둘이서 몇 바퀴를 돌았다. 이를 악물고 달려 나가던 다른 한 아이가 마침내 뜀틀을 넘었다. 착지하자마자 그 아이는 달릴 준비를 하고 서 있는 나를 힐긋 바라보았다. 나는 그 아이의 웃음을 보았고, 동료를 잃었다. 그 아이는 꼴찌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안도했다.
선생님은 혼자 남은 내게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끝까지 해보자고. 나는 뜀틀로 달려가다 뜀틀을 짚고 두 발을 들었다 내리는 동작을 무한 반복했다. 내 목표는 뜀틀을 넘는 게 아니라 뜀틀 위에 주저앉아 보는 거였다. 발판을 밟고 뛰어오른 뒤 단 한 번도 다리를 벌리지 못했다. 앉아서 나를 바라보던 아이들의 줄이 흐트러지고 점점 시끄러워졌다. 결국 보다 못한 체육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그 순간 체육 선생님은 내 삶의 한 영역에 보이지 않는 한계선을 그었다. 넌 절대 할 수 없어,라는 필패의 확고한 믿음을.
벼룩은 자기 키의 100배 이상도 뛸 수 있다. 이런 벼룩 위에 유리 덮개를 설치하면, 높이 뛰던 벼룩이 머리를 부딪친다. 벼룩은 부딪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뛰는 높이를 조절해 낮춘다. 나중에 유리 덮개를 치워 버려도 벼룩은 그 이상 높이로는 더 이상 뛰지 못한다.
유리 덮개를 덮은 사람은 그날의 체육 선생님이나 조롱하던 반아이들이었을지 모르지만, 유리 덮개가 사라진 후에도 더 이상 뛰지 않는 건 나 자신이다. 외부 상황에 기인한 한계라 할지라도 결국 그 한계를 짓는 사람은 나 자신이란 얘기다. 난 절대 뜀틀을 넘을 수도 없고 운동이라면 젬병이야, 하며 내 머릿속에서 스스로 그어 버린 한계선. 그 한계선을 걷어내는 것도 내 몫이다.
비어 있는 체육관에 들어가 뜀틀 앞으로 다가간다. 열 살 때 거대해 보였던 뜀틀이 생각보다 낮았다. 뜀틀얼 가만히 어루만졌다. 뜀틀 위에 올라가 다리를 벌리고 걸터앉았다. 열 살짜리 내 소원을 들어주며, 어린 내 어깨를 토닥거린다.
이제 유리 덮개를 치워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