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함
여덟 시간 비행을 하고 겨우 땅에 발을 디뎠는데, 두 시간 후에 다시 비행기를 일곱 시간을 더 타야 한다. 기내에서는 좁은 좌석에 꼼짝없이 앉아 겨우 한 권 들고 탄 책을 읽었다. 작은 수첩에 메모를 끼적이고 책을 야금야금 아껴 읽는 것 외에는 아무런 할 일이 없었다. 지루함의 정의에 꼭 맞는 환경에 갇혀 있는데 이상하게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루함으로부터 달아나는 중이라 설레기까지 했다.
두바이라는 낯선 땅에서 겨우 스타벅스에 앉고 싶진 않았다. 개성을 자랑하는 프랑스마저도 스타벅스와 맥도널드 천지가 된 시대라, 두바이 공안 안에서 커피 한 잔 마실 만한 곳이라고는 스타벅스 밖에는 찾을 수 없었다. 바에서 와인이나 위스키를 한잔할 수도 있었겠지만, 맨 정신으로 지루함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지루함에서 벗어나려면 안전을 포기해야 한다. 역한 냄새와 고약한 맛을 가진 음료가 나온대도 하하 웃겠다는 각오가 없다면, 결국 세계 어디를 가든 규격화된 호텔이나 스타벅스의 익숙하고 정형화된 서비스만 경험하다 돌아오게 될 테니. 아슬아슬한 외줄에 발을 디딜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자만이 진정 지루함에서 벗어나 짜릿한 흥분을 맛볼 수 있다. 솔직히 안전에 상당히 중독되어 이제는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두렵다.
공항에 앉아 지루함에 대해 얘기하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삶에서 사치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쇼펜하우어는 "삶이란 고통과 지루함 사이에 내던져져 그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것"이라고 했다. 생존이 급급한 상황에서는 지루함을 느낄 여유가 없다. 지루함이란 어휘 자체도 삶의 여유가 생긴 근대에 와서야 생긴 말이다. 전근대사회에서는 지루함 대신 게으름이 있었을 뿐.
지루함은 결코 게으른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의미를 묻고 의미를 찾는 사람들의 문제다
라르스 스벤젠 <지루함의 철학> 중
지루함은 일을 많이 하고 안 하고나, 바쁘고 안 바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쉬지 않고 일을 하고 엄청나게 바쁜 사람도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다. 지루함은 일 자체에서 오는 게 아니라, 무의미한 일을 한다는 의식에서 온다. 자의식이 없다면 지루함이나 권태란 감정 자체를 느낄 수 없다. 자의식마저 상실한 깊디깊은 지루함이 더 위험한 게 아닐까 싶지만. 스벤젠에 따르면, 보통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거나,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할 때 지루함을 느낀다. 이런 지루함을 넘어 "스스로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는 삶에서 방향을 잡아 나아갈 능력을 상실했을 때 정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지루함에 빠지게 된다." 자신에게 귀 기울이지 못하고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을 맹목적으로 따르며 살 때 삶이 다다르는 곳이 바로 구제불능의 지루함이다.
결국 자신을 잘 아는 사람만이 지루함을 제대로 느낄 수도 있고, 또 그 지루함에서 벗어날 가능성도 있다.
지루함이라고 하면 누군가는 게으름, 느림, 심심함, 따분함, 외로움이나 권태, 시큰둥함, 지겨움, 질림, 짜증이나 분노를 떠올릴지 모른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만약 지루함이 느림이나 심심함 등으로 나타난다면 무조건 피할 게 아니라, 그 지루함을 제대로 느껴보는 게 좋다. 혼자만 귀에 이어폰을 꽂고 다른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처럼 세상이 알레그로로 돌아갈 때, 안단테의 음악을 듣는 것이다. 세상은 왜 그토록 부산하고 소란스러운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왜 그토록 열을 내는지, 어리둥절해 고개를 갸우뚱하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시간과 시간 사이의 미세하고 가냘픈 틈이 갈라지는 걸 놓치지 않는 삶. 멋지지 않은가.
혹여 지루함이 내게 외로움이나 고독을 떠올리게 한다면 더더구나 피하지 말자. 길게 늘여진 시간 속에서 자아를 고통스러울 정도로 깊이 있고 민감하게 의식할 수 있다면, 섣불리 그 지루함을 해소하려 애쓰지 않을 것이다. 그런 권태는 오로지 온전히 본래의 '나'로 돌아가야만 해소될 수 있는 권태니까.
나를 괴롭힌 것은 살아갈수록 외로워할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나는 잃어버린 나의 외로움을 찾는 길을 택하고 싶었다.
안도현 <외로울 때는 외로워하자 3> 중
내가 누구인지 자꾸 잊게 하는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나를 찾기 위해 혼자 먼 여행길에 올랐다. 곁에 아무도 없고, 아무런 할 일도 없는 이 순간이 바로 나를 찾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다. 조금 심심하고 따분하고 외로워도 지루함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지는.
자, 아슬아슬한 외줄 위에 한 발짝 내디딜 준비가 되었는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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