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딸각하는 소리와 함께 깜깜한 비행기 천장에 수많은 별이 촘촘히 박혔다. 아랍 에미레이트 항공의 비행기를 타면 별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람이 만들어낸 가짜 별이란 걸 알면서도 가슴이 콩콩 뛴 건, 가족을 남겨두고 혼자 두바이를 경유해 파리로 날아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일 지도. 비행기 천장의 별을 바라보던 그 시각, 큰아들은 유치원 졸업식 무대에서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있었을 것이다. 수많은 관객 사이에서 아빠 얼굴을 찾아내며 조금 안도했겠지. 당연히 보이지 않을 엄마를 잠시 더 찾아보다 시선을 떨궜을지 모른다. 인생은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할 때가 아니라, 그걸 벗어났을 때에야 비로소 참맛을 알 수 있다. 아들의 졸업식장에 있었다면 결코 아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감동은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날마다 눈 감고도 이 닦고 세수하듯 또 하나의 이벤트를 능숙하게 소화해 냈을 뿐이었겠지.
여행의 첫날, 하루오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부산 뒷골목의 어느 게스트하우스에서 - 아마도 그건 모텔이나 여관일 거라고 그녀가 정정해 주었다- 머물게 된 하루오는 전에 없이 길고 깊은 잠을 잤다. 깨어 보니 낯선 방이었다. 몇 겹의 삶이 지나간 듯 오래 잔 느낌이었다. 그 아침,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던 하루오는 어쩐지 바다 밑바닥에서 빠져나오는 기분으로 몸을 일으켰다. 창문을 열고 소음으로 가득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희미한 햇살이 있었고, 무수한 자동차들이 지나다녔고, 매연이 뒤섞인 찬 공기가 창문으로 밀려들었다. 하루오는 아, 하고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어딘지 모르게 그것은 새로운 세계였던 것이다.
여자와 헤어지고 찬 공기가 흘러다니는 거리를 걸어가면서, 하루오는 기이하게도 죽고 싶었던 마음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을 하루오는 이렇게 표현했다. 말하자면 그건, 나라는 존재가 오 센티미터쯤 다른 세계로 옮겨진 것 같은, 그런 순간이 아니었을까.
이장욱 <절반 이상의 하루오> 중
살면서 오 센티미터쯤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자기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꼭 필요하다.
마침 파리는 한 해 중 해가 가장 길다는 하지라 Fête de la Musique로 흥청거렸다. 거리 곳곳에서 다양한 음악과 춤을 볼 수 있었다. 노천카페에 앉아 칵테일을 한 잔 시켰다. 밤새 음악에 맞춰 자유롭게 몸을 흔드는 사람들을 보며 그곳에 흐르는 자유의 공기를 마셨다. 파리에서는 누구나 주인공이 되고, 예술가가 될 수 있다더니, 글을 쓰고 싶은 열정이 솟아올랐다. 이런저런 잣대로 재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무대 뒤로 밀어 버리고, 진정한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삶을 좌지우지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내어주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음악에 몸을 실었다. 신기하게도 겨우 오 센티지만, 그 오센티를 옮기지 않고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평생 많은 바다를 보았지만, 코르시카 섬 산타 줄리아 해변의 해 질 녘 바다 빛깔처럼 신비한 빛깔의 바다른 본 적이 없다.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렀지만, 화면에 담긴 색은 눈에 보이는 빛을 100분의 1도 담아내지 못했다. 진주를 액체로 풀어놓은 듯한 우윳빛이랄까, 은은하고 신비한 오팔색이랄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빛깔의 바다를 보며 배고픔도 잊고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 어떤 곳이든 의미가 있고 나를 새롭게 해 주겠지만, 뭔가 답답한 일이 있거나, 슬프거나, 외로울 때 등 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휘두르려 할 때는 하늘과 바다를 보고, 자연을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떠나는 게 좋다. 시시각각 다르지만 언제 찾아가도 한결같은 바다 앞에 서면 죽네사네 고민했던 문제들도 사소하게 보인다. 모든 걸 벗어 넓은 바다에 툭 던져 넣으면, 바다는 내게 가슴을 펴고 세상을 대할 수 있는 대범함을 돌려준다.
살면서 열심히 달려야 할 때가 있듯이, 멈춰야 할 때도 있다. 기온은 몇 도, 습도는 몇 퍼센트 하는 기상청 자료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내 눈으로 보는 일몰의 아름다움과 내 코로 맡는 바람의 향기 같은 걸 놓치지 않고 살고 싶다. 뭔가 막히는 것 같고 인생의 기로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면 주저 없이 떠나라. 시간이 좀 더 있고, 돈이 좀 더 생기면, 하고 미루고 싶을 때도 떠나야 한다. 인생에서 시간과 돈, 에너지가 모두 있는 순간은 거의 없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니까. 에너지가 넘치는 젊은이들에게는 어떻게든 여행을 떠나라고 말해주고 싶다. 시간을 쪼개고 몸이 좀 불편하더라도 돈이 덜 드는 여행으로. 선택의 기로에서 떠난 여행일수록 내적 성장에 큰 영향을 준다. 그 여행이 미래의 나를 만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명한 명소의 사진을 많이 찍어 왔다 해도 공허해질 수 있다. 그런 사진은 인터넷만 조금 뒤져도 수없이 튀어나올 테니까. 여행 중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관찰하고 사색하고, 무엇보다도 그걸 글로 남겨야 한다. 글을 쓰기 위해 바라보면 모든 걸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찍은 사진보다 더 잘 찍은 사진은 수없이 많이 존재하지만, 그곳에서 내가 적은 글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기록으로 남는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자의 시선'은 소중하다. 당장 떠나지 못할 상황에서는 내가 사는 동네 등 익숙한 곳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낯설게 바라보자. 어디를 가느냐보다 어떤 시각으로,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훨씬 중요한 게 여행이니까.
아이의 졸업식마저 뒤로 한 채 혼자 여행을 다녀온 뒤, 몇 달째 한 줄도 못 쓰고 꽉 막혀 있던 원고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몸은 피곤하고 시차 적응을 못해 수시로 꾸벅꾸벅 졸기는 해도, 에너지는 충만해진 것이다.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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