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소희 Apr 29. 2024

떠나라, 주저 말고 떠나!

여행

딸각하는 소리와 함께 깜깜한 비행기 천장에 수많은 별이 촘촘히 박혔다. 아랍 에미레이트 항공의 비행기를 타면 별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람이 만들어낸 가짜 별이란 걸 알면서도 가슴이 콩콩 뛴 건, 가족을 남겨두고 혼자 두바이를 경유해 파리로 날아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일 지도. 비행기 천장의 별을 바라보던 그 시각, 큰아들은 유치원 졸업식 무대에서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있었을 것이다. 수많은 관객 사이에서 아빠 얼굴을 찾아내며 조금 안도했겠지. 당연히 보이지 않을 엄마를 잠시 더 찾아보다 시선을 떨궜을지 모른다. 인생은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할 때가 아니라, 그걸 벗어났을 때에야 비로소 참맛을 알 수 있다. 아들의 졸업식장에 있었다면 결코 아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감동은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날마다 눈 감고도 이 닦고 세수하듯 또 하나의 이벤트를 능숙하게 소화해 냈을 뿐이었겠지.



여행의 첫날, 하루오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부산 뒷골목의 어느 게스트하우스에서 - 아마도 그건 모텔이나 여관일 거라고 그녀가 정정해 주었다- 머물게 된 하루오는 전에 없이 길고 깊은 잠을 잤다. 깨어 보니 낯선 방이었다. 몇 겹의 삶이 지나간 듯 오래 잔 느낌이었다. 그 아침,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던 하루오는 어쩐지 바다 밑바닥에서 빠져나오는 기분으로 몸을 일으켰다. 창문을 열고 소음으로 가득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희미한 햇살이 있었고, 무수한 자동차들이 지나다녔고, 매연이 뒤섞인 찬 공기가 창문으로 밀려들었다. 하루오는 아, 하고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어딘지 모르게 그것은 새로운 세계였던 것이다.

여자와 헤어지고 찬 공기가 흘러다니는 거리를 걸어가면서, 하루오는 기이하게도 죽고 싶었던 마음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을 하루오는 이렇게 표현했다. 말하자면 그건, 나라는 존재가 오 센티미터쯤 다른 세계로 옮겨진 것 같은, 그런 순간이 아니었을까.

이장욱 <절반 이상의 하루오> 중


살면서 오 센티미터쯤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자기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꼭 필요하다



마침 파리는 한 해 중 해가 가장 길다는 하지라 Fête de la Musique로 흥청거렸다. 거리 곳곳에서 다양한 음악과 춤을 볼 수 있었다. 노천카페에 앉아 칵테일을 한 잔 시켰다. 밤새 음악에 맞춰 자유롭게 몸을 흔드는 사람들을 보며 그곳에 흐르는 자유의 공기를 마셨다. 파리에서는 누구나 주인공이 되고, 예술가가 될 수 있다더니, 글을 쓰고 싶은 열정이 솟아올랐다. 이런저런 잣대로 재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무대 뒤로 밀어 버리고, 진정한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삶을 좌지우지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내어주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음악에 몸을 실었다. 신기하게도 겨우 오 센티지만, 그 오센티를 옮기지 않고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평생 많은 바다를 보았지만, 코르시카 섬 산타 줄리아 해변의 해 질 녘 바다 빛깔처럼 신비한 빛깔의 바다른 본 적이 없다.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렀지만, 화면에 담긴 색은 눈에 보이는 빛을 100분의 1도 담아내지 못했다. 진주를 액체로 풀어놓은 듯한 우윳빛이랄까, 은은하고 신비한 오팔색이랄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빛깔의 바다를 보며 배고픔도 잊고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 어떤 곳이든 의미가 있고 나를 새롭게 해 주겠지만, 뭔가 답답한 일이 있거나, 슬프거나, 외로울 때 등 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휘두르려 할 때는 하늘과 바다를 보고, 자연을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떠나는 게 좋다. 시시각각 다르지만 언제 찾아가도 한결같은 바다 앞에 서면 죽네사네 고민했던 문제들도 사소하게 보인다. 모든 걸 벗어 넓은 바다에 툭 던져 넣으면, 바다는 내게 가슴을 펴고 세상을 대할 수 있는 대범함을 돌려준다.



살면서 열심히 달려야 할 때가 있듯이, 멈춰야 할 때도 있다. 기온은 몇 도, 습도는 몇 퍼센트 하는 기상청 자료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내 눈으로 보는 일몰의 아름다움과 내 코로 맡는 바람의 향기 같은 걸 놓치지 않고 살고 싶다. 뭔가 막히는 것 같고 인생의 기로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면 주저 없이 떠나라. 시간이 좀 더 있고, 돈이 좀 더 생기면, 하고 미루고 싶을 때도 떠나야 한다. 인생에서 시간과 돈, 에너지가 모두 있는 순간은 거의 없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니까. 에너지가 넘치는 젊은이들에게는 어떻게든 여행을 떠나라고 말해주고 싶다. 시간을 쪼개고 몸이 좀 불편하더라도 돈이 덜 드는 여행으로. 선택의 기로에서 떠난 여행일수록 내적 성장에 큰 영향을 준다. 그 여행이 미래의 나를 만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명한 명소의 사진을 많이 찍어 왔다 해도 공허해질 수 있다. 그런 사진은 인터넷만 조금 뒤져도 수없이 튀어나올 테니까. 여행 중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관찰하고 사색하고, 무엇보다도 그걸 글로 남겨야 한다. 글을 쓰기 위해 바라보면 모든 걸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찍은 사진보다 더 잘 찍은 사진은 수없이 많이 존재하지만, 그곳에서 내가 적은 글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기록으로 남는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자의 시선'은 소중하다. 당장 떠나지 못할 상황에서는 내가 사는 동네 등 익숙한 곳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낯설게 바라보자. 어디를 가느냐보다 어떤 시각으로,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훨씬 중요한 게 여행이니까. 


아이의 졸업식마저 뒤로 한 채 혼자 여행을 다녀온 뒤, 몇 달째 한 줄도 못 쓰고 꽉 막혀 있던 원고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몸은 피곤하고 시차 적응을 못해 수시로 꾸벅꾸벅 졸기는 해도, 에너지는 충만해진 것이다.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강연 신청 및 상위 1% 독서 커뮤니티 무료입장


https://link.inpock.co.kr/sohee_writer/





이전 22화 시드는 게 두려워 피지 않을 꽃이 어디 있으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