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죽음만큼 확실하면서 동시에 불확실한 건 세상에 없다. 그 누구도 죽음은 피할 수 없고,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데도, 죽음만큼 모호하게 다가오는 것도 없다. 죽는다는 건 도대체 어떤 건지, 그리고 나는 언제 죽게 될 것인지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다.
죽음을 인식하는 생명체는 세상에 인간뿐이다. 동물들은 죽음을 피해 반사적으로 행동하지만 죽음에 대해 사유하거나 죽음에 대한 앎이 없다. 죽음에 대한 사유는 왜 중요할까? 공기의 중요성은 공기가 없는 곳에 잠깐 있어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것처럼, 삶이 사라지는 지점인 죽음에 대해 사유할 때 우리는 삶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장례식장이나 공동묘지, 화장터 등을 방문하거나, 유서나 버킷 리스트를 적어 보면 죽음을 알 수 있을까? 분명 그런 일들로 죽음을 온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최소한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 앞에 겸허해질 수는 있지 않을까. 삶이 시들해지거나 시시해질 때, 나 자신의 존재 가치가 바닥을 드러낼 때, 삶이 무의미하거나 공허하게 반복될 때마다 저편에 있는 죽음을 살짝 곁눈질해 보고는 했다. 며칠 전에도 삶을 지탱해 줄 작은 불씨 하나 찾겠다는 마음으로 유서를 써 보았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네 가슴에 남긴 모든 상처를 가슴 깊이 후회하니 용서해 주렴. 네가 지금 어떤 일을 겪고 있든, 세상이 너에게 뭐라 하든, 이거 하나만 기억해 줘. 너를 뱃속에 품었을 때, 엄마는 지극히 행복했고, 너를 세상에 내어놓는 통로가 된 일을 평생에 가장 잘한 일로 여긴다는 걸. 표현 방식이 아무리 못났더라도 너를 특별히 사랑한다.
겨우 짧은 몇 줄의 유서를 가상으로 써 보는 것이었지만, 죽음의 문턱에 선 것처럼 진지하고 겸허해졌다. 보잘것없다고 여겼던 내 삶이 더 이상 시시하거나 공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의 문턱을 기웃거려야만 겨우 삶을 조금 더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다니... 삶만큼 중요한 게 없음에도 우리는 왜 종종 삶을 푸대접하는 걸까?
진정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그 이외의 것 - 세계는 삼차원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정신은 아홉 개 혹은 열두 개의 범주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 등은 그 이후의 일이다.
알베르 카뮈 <시지프스의 신화> 중
인생이 정말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젊은 시절 어리석은 판단과 선택으로 삶이 흙탕물 속에 던져졌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도 바로 이것이었다. 잘못된 선택을 한 나 자신에게 벌주고 싶었고, 진흙탕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진이 다 빠져 새로운 삶을 시작할 자신도 없어,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 수면제 양이 부족해서, 손목에 칼을 충분히 깊이 꽂지 못해 죽음의 문턱을 넘지 못했지만, 살아남은 나를 발견했을 때 안도했다. 무가치한 삶이라 더 지속하고 싶지 않고 더 이상 고통을 감내할 능력도 없다고 했지만, 나 자신도 모르는 내부에 삶에 대한 강한 욕망이 있었던 것이다. 용기가 부족해 스스로를 죽이는 데 실패한 것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만약에 성공했다면 보지 못한 내면의 삶의 욕망을 깨닫지도 못한 채, 아름답지 못한 모습으로 삶을 마감했을 테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존엄의 손상이 안겨준 절망감으로, 또 희망과 삶의 의미를 상실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를 차지한 지 오래되었다. 날마다 수십 명이 스스로 생명을 끊는 나라다. 스스로의 삶을 중단하는 건 결코 가벼운 결정이 아닌데, 1,2,30대 젊은이들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라고 하니, 이 사회의 성인으로서 부끄럽다. 사회경제적 불평등 구조나 가정불화 등 혼자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이유로 자살하는 젊은이들에게 든든한 땅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미안하다.
극심한 가난에 허덕이고 부모와 함께하지 못하며 마약과 폭력 등에 노출된 아이들의 삶을 추적해 보면, 2/3 정도는 환경이 예견하는 대로 범죄자나 무기력자로 자라난다. 하지만 아무리 열악한 환경이라도 여전히 1/3의 사람들은 그런 환경을 이겨낸다. 한 연구에서 그 1/3의 사람들을 분석해 보니, 누군가 자기를 무조건 지지해 주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상황과 관계없이 내 삶은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고 속삭여주는 누군가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어떤 고난과 역경이라도 이겨낼 수 있다는 말이다.
그 비결이 기대했던 것보다 쉬운 일이어서 충격을 받았다. 정치, 경제, 교육 제도를 뒤바꾸는 일은 당장 할 수 없지만, 힘겨워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지지를 보내주는 건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여전히 단 한 명의 지지자도 찾지 못한 2/3의 사람들이 마음에 걸려 많이 아팠다. 내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는, 지지해 줄 한 사람을 찾아 도움을 청하자. 또 내 곁에 고통을 겪는 누군가가 있다면 따뜻한 말 한마디로 지지해 주자.
자살만이 진정 중요한 철학적 문제라고 했던 카뮈조차도 삶의 무의미와 권태, 부조리 등에 절망하고 죽음에 대한 동경을 드러냈지만 끝내 자살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섣부른 판단을 종용해 자살 여부를 결정하라는 게 아니라,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당장 삶의 의미가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 의미를 찾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유일한 권리라고 주장했으니까.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들어갔다 겨우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내와 딸이 자신을 벌레 취급하며 떠나가 버리자 자살을 결심했던 이가 있었다. 그때 피에르 신부는 그 사람에게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에 일손이 필요하니 도움을 달라고 부탁했다. 잘 곳이나 먹을 것, 돈을 제공한 게 아니라 그저 도움을 청했을 뿐이었는데, 자살을 결심했던 그는 살아가기로 마음을 바꾸고 열심히 봉사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진정 필요했던 건 좋은 환경이나 물질적 부 같은 게 아니라 바로 삶의 의미였던 것이다.
삶에 대해 몽상하지 말자. 삶을 만들어 가자. 공허한 말에 만족하지 말고 사랑하자. 그리하여 시간의 어둠에서 빠져나갈 때, 모든 사랑의 원천에 다가서는 우리의 마음은 타는 듯 뜨거우리라.
피에르 신부 <단순한 기쁨> 중
피에르 신부는 극심한 고통 중 자살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으로부터 삶의 의미를 묻는 편지를 받고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는 세상에 다양하고 많은 소망이 존재하지만, 희망은 단 하나라고 했다. '희망이란 삶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도,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에는 분명 의미가 있다. 우리는 그 믿음을 가지고 살면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죽음은 우리에게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이자 미지의 것, 닿을 수 없기에 때로 동경의 대상이 된다. 죽음이 두려워 피하려 애쓰든, 죽음을 갈망하든, 두 모습 다 현재의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게 아닐까. 과거에 대한 집착이나 미래에 대한 염려를 모두 버리고, 지금 주어진 현재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 그것이 나의 삶과 죽음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
언젠가 시들 것이 두려워 활짝 피는 데 소홀한 꽃이 어디 있으랴. 꽃을 피우는 게 힘겹다고 꽃봉오리를 싹둑 잘라내는 꽃이 어디 있을까. 당신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꽃이다.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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