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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Apr 15. 2024

치열한 삶에는 상처가 있다

상처

지난 일들을 들춰 보면 얼굴이 붉어진다. 수많은 실수와 실패, 잘못으로 얼룩진 발자취는 마치 취객이 남긴 흔적 같다. 좀 더 아름답고 멋지게 살아올 수는 없었던 걸까. 자책하다 곧 관두었다. 고민하느라 보낸 불면의 밤들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으니까. 결과적으로는 최상의 선택이 아니었을지라도, 매 순간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 결과로 이룬 자취가 비록 못났을지언정 내 고뇌의 흔적이다


'상처를 최대한 덜 받기'가 최우선 순위의 목표였다면, 아마 걸어온 발자국들이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전혀 상처받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해도, 좀 더 용이하고 편안한 선택들로 지금보다는 덜 망가진 모습으로 웃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정말 그럴까?


두 사람이 있었다. 80년 5월 광주의 참혹한 역사를 목격한 후 대학에서 만나 친구가 된 두 사람. 80년대 초반 대학은 정치적 격동의 한복판에 있었다. 진실과 정의를 부르짖는 피 끓는 젊은이들이 강의실 대신 거리로 뛰쳐나갈 수밖에 없던 시절. 역사가 은폐하려는 진실 앞에서 두 친구 모두 분노했다. 숱한 고민의 밤을 보냈다.


한 친구는 학생운동 조직의 지도부로 적극적으로 민주화운동을 하다 큼직한 사건에 이름이 올라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같은 시기 군대에 있던 다른 이는 친구의 수감 소식을 듣고 부끄러워 햇빛을 볼 수 없었다. 제대하고 돌아와 복학한 후에도 두문불출하고 공부만 했다. 출소한 친구는 그 후에도 숱한 죽음과 고난의 상처를 겪으며 민주화운동과 시민단체 활동 등 빛도 안 나는 험한 자갈길을 걸었고, 제대한 친구는 햇빛을 피해 공부만 하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해 탄탄대로를 걸었다.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두 친구가 50대에 접어들어 중국 땅에서 다시 만났다. 나는 눈물이 맺힌 채 지난 일을 회상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두 사람이 걸어온 발자취가 완전히 달라 보여도, 두 친구 가슴속에는 각자의 고민과 상처로 피워낸 꽃 한 송이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 상처로 피운 꽃은 모양도, 향기도 달랐지만, 모두 아름다웠다.



몸에 슬픔으로 뭉친 구근을 매달고 있어, 남은 생 아무 고통도 없이 꽃을 피우고 싶은 그 마음이 더 고통인 것을 아는

-김신용 <도장골 시편> '부레옥잠' 중



치열하게 사는 모든 삶에는 상처가 있다. 한순간의 선택으로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지만,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로 인해 고통받으며 살아낸 삶은 어떤 모양이든 결국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다. 누구는 붉은 장미를 피웠으니 100 점, 누구는 민들레니 50 점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치열하게 고민했기에, 모든 발자국은 아름답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삶이 점점 더 소설이나 영화를 닮아가는 일일지 모른다. 어릴 적에는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일들이 그저 픽션에 지나지 않았는데, 나이를 먹다 보니 소설이나 영화보다 현실이 더 충격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몰려다니며 함께 수다를 떨고 까르르 웃던 친구들 중에도 동성에게만 끌려 이성을 사랑할 수 없는 이도 있고, 가까운 사람에게 강간당한 후 그 누구의 스킨십도 견디지 못하는 이도 있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 유산을 한 이도, 멀쩡하게 생긴 남편에게 온몸이 멍들고 뼈에 금이 가도록 맞아본 이도, 남편에게 이미 여러 번 결혼한 과거가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된 이도 있다. 시곗바늘을 돌려 과거의 한순간으로 돌아간다면, 누구도 그들 모습에서 그런 미래를 예측할 수 없을 텐데.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아픈 속사정을 털어놓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들의 아픔을 짐작조차 하지 못할 텐데. 다른 이들과 서로의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나는 삶이 내게만 혹독하다는 불평을 버렸다.


겉으로 어떻게 보이든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아픔과 상처를 지니고 살아간다.



내 얼굴에 슬픔이 없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나처럼 고생을 안 해본 사람은 인생을 취미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말도 들었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때는 서운했다. 정말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하는가 싶어서. 화려한 타이틀이나 경력 등만 보고 가진 선입견이겠지만, 나는 자신을 기특하다고 여기기로 했다. 그동안 고통과 슬픔을 소화해 내며 잘 살아왔다는 칭찬처럼 여겨져서.


삶이 내게만 잔인하고 불공평하다고 불평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에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고통을 가벼이 여겨서가 아니라, 아픔과 상처를 소화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걸어온 발자국이 못났어도, 어지럽게 흩어진 발자국이 힘든 길을 돌아왔다 해도 그로 인해 피고 있는 가슴속 꽃 한 송이 바라보며, 내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싶다.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관대할 수 있다. 남은 품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게 마련이다.
괴테 <파우스트> 중

반듯한 걸음으로 발자국을 찍어가든, 이리 갈까 저리 갈까 고민하며 어지럽게 발자국을 흩뿌리든, 각자의 발자취는 그 나름대로 아름답다. 그리고 어떻게 살든 결국 상처를 입는다. 그럼 고민할 필요 없이 그냥 눈 감고 막 뛰어가면 될까? 아무 고뇌 없이 눈 감고 종이에 물감만 뿌린다고 예술 작품이 되는 건 아니다. 캔버스에 페인트를 들이붓고 물감을 흩뿌리던 잭슨 폴록도 하나하나의 작품을 위해 오래도록 구상하고 고민했다. 뒤샹이 변기를 전시하고 샘이라 이름 붙일 때도, 모나리자에 수염을 그려 넣고 작품이라고 할 때도 그만의 고민과 생각이 있었다. 결국 화폭 위의 결과물보다 그걸 탄생시키기 위한 고뇌의 과정이 더 중요하듯,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 치열하게 고민하며 보냈던 그 고뇌의 시간이 훨씬 가치가 있다. 내가 고뇌하며 보낸 시간만큼 내 가슴의 꽃 한 송이가 물을 마시고 양분을 흡수하며 자기만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드러낼 테니까.



잠시 지나온 흔적들을 돌아보며 반성하는 시간은 필요하지만, 과거에 얼굴을 묻고 후회하며 아까운 청춘을 보내지는 말자. 지금부터 내딛게 될 한 걸음 한 걸음을 위해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자. 쇼펜하우어는 '우리 인생의 첫 40년은 본문이고, 그다음 30년은 본문에 대한 주석'이라고 했다. 본문이 끝났다고 아무렇게나 책을 덮을 수는 없지 않은가. 본 책 보다 인기 좋은 부록처럼, 재미나고 멋진 주석이나 부록을 써 볼까.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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