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소희 Apr 08. 2024

괜찮아, 넘어져도 일어나면 돼!

실패

오늘도 거리에는 나를 비웃듯 여유 있는 표정으로 자전거를 타고 쌩쌩 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넓은 중국 땅에 자전거를 못 타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자전거가 내 옆을 쌩하니 지나갈 때마다, 나는 주눅이 든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중국에서 20년 가까이 살았음에도 나는 자전거를 못 탄다.



스무 살 때, 중국어를 배워 보겠다고 낯선 중국 땅에 첫발을 디뎠다. 그때는 정말 자전거가 차보다 많을 때였으니, 자전거를 못 탄다는 건 장애를 지닌 것과 다름없었다. 자전거를 배우려고 시도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한두 번 페달을 밟다 휘청하더니 쿵! 무릎은 까지고 상처 사이로 핏물이 배었다. 눈물이 핑 돌면서 자전거 배우기를 포기해 버렸다. 무릎에 난 상처가 따갑기는 했지만, 죽은 만큼 아팠던 건 아니었는데. 학교 다닐 때 반에서 유일하게 뜀틀을 못 넘었던 나는, 스스로 운동신경이 없다고 단정하며 살아왔다. 다시 일어나 봤자 금세 또 넘어질 거야. 그 넘어짐이 한두 번이 아닐 거란 짐작에 제대로 시도해 보기도 전에 눈앞이 캄캄해진 것이다. 자전거뿐 아니다. 스키도 눈밭에 몇 번 넘어지다 포기해 버렸다.



누구도 안 넘어질 수는 없지.


넘어지는 게 두려워 살아가는 데 편리와 재미를 주는 많은 것들을 놓치고 살았다. 세상 사람들은 다 쌩쌩 자전거를 타고 스키를 타는데, 나만 넘어진다고 생각했다. 혼자만은 아니라 해도 나처럼 계속 넘어지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고 믿었다. 넘어져서 아프기보다는 넘어질 때마다 창피했고, 엄청난 잘못처럼 느껴졌다. 넘어지는 건 잘못이 아니고, 누구나 넘어질 수 있다. 오히려 넘어진 그 순간이 바로 성공과 실패, 상승과 추락의 갈림길이 된다.



평생 자전거와 스키를 못 타고 사는 것쯤이야 인생에서 사소한 일일 수 있다. 단지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뿐. 하지만 몸이 아파 시험 준비를 못 한 채 시험을 볼 때, 내 앞에 앉은 우등생 친구의 답안지가 보이기에 딱 한 문제를 보고 적었는데 부정행위로 0점 처리되었다면 어떨까? 무심코 페이스북에 올린 문장 하나가 네티즌의 분노를 일으켜 하루아침에 악플이 백만 개쯤 달렸다면? 별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잘 나가는 친구에게 찍혀 하루아침에 전교생의 왕따가 된다면? 호기심에 딱 한 번만 해보려던 남배나 마약에 나도 모르게 중독이 된 걸 발견했다면?



아마 아무도 없는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거나 심지어 죽고 싶단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그런 일을 당할 때가 있다. 때로는 내 잘못으로, 때로는 고의가 아닌 실수로, 때로는 잘못도 실수도 아닌데 억울하게 넘어질 수 있다.


달리기 시합을 하다 갑자기 돌에 걸려 넘어졌을 때, 우리 앞에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 다시 일어나 뛰든가, 그대로 주저앉아 울든가. 


'다시 일어나 뛰어도 어차피 꼴찌 할 텐데, 뭘' 당장은 일어나 다시 뛰나 그대로 주저앉아 있으나 결과가 같다고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그때 포기하고 주저앉은 사람과 다시 일어나 뛴 사람은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엄청난 차이를 보게 된다. 살다가 넘어지는 일은 결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살다 보면 수없이 다양한 상황에서 갖가지 모양으로 넘어지게 된다. 넘어질 때 다시 일어나려고 노력해 본 사람은 다음에 넘어질 때 다치지 않게 요령껏 넘어지는 법을 터득하거나, 넘어진 뒤 일어나는 과정에서 배운 지혜를 이용해 좀 더 빨리 일어날 수 있게 된다. 한 번 넘어진 걸로 필요 이상의 좌절과 낙심에 빠지면, 자칫 살아갈 희망과 힘마저 잃게 될 수 있다.




사람들의 시선이 영하 8도처럼 차가워도
난 잘 살아가 내 영화 같은 삶 날 부러워해 그래서 적이 많아
난 죽었다 살아나 난 다시 빛을 바라봐 날
잊을 때 즈음해서 난 귀신처럼 나타나
무슨 공연을 하든 내 콘서트로 만들어놔
살고 있는 전설 역사에 남아 난

박재범 'Clap' 가사 중


오래전 즐겨 듣던 노래 가사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원래 6명의 다른 가수와 함께 그룹을 이루고 있었지만, 한국을 비하하는 발언이 인터넷에서 뜨겁게 비난받자 결국 그룹을 탈퇴했다. 그 과정의 진실은 다 알 수도 없고 파헤쳐 알고 싶지도 않지만, 어쨌든 한창 잘 나가던 그는 갑자기 넘어지는 순간을 경험했다. 정말 악의를 가지고 큰 잘못을 한 것이든 오해나 음모로 피해를 당한 것이든, 크게 넘어졌던 그가 이 노래의 가사처럼 다시 일어나 툴툴 털고 더 도약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며 흐뭇했다.



살다 보면 내 곁에 아무도 없는 것 같은 깊은 고독과 외로움을 느낄 때가 온다.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을 때, 사람들의 시선이 영하 8도, 아니 영하 20도처럼 차갑게 느껴질 때, 마치 죽은 것 같이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 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나를 밝게 비추고 보호해 주던 나의 세계가 갑자기든 천천히든 무너져 버렸을 때, 희망이란 것 자체에 회의가 들 수 있다. 내게 다시 내일이란 게 있을까? 다른 기회가 정말 올까? 다시 바닥부터 쌓아 올리는 게 가능할까? 모든 걸 지우고 새롭게 시작하는 게 가능할까 등등.


벽은 높고, 두텁고, 강하고, 오만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세상 어떤 벽도 하늘 위까지 막혀 있진 않다. 

안도현 <꿈> 중


죽을 것 같이 고통스럽던 순간도 지나간다. 바닥을 치면 다시 오르게 되어 있고, 모든 걸 잃고 바닥이 드러났다고 여겨져도 어느 순간 새로운 것들로 채워져 있다. 넘어져서 창피하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순간은 반드시 지나간다. 지나고 나면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다는 걸 깨닫게 된다. 저마다의 아픔을 통해 또 한 송이의 꽃을 가슴에 피우게 된다.


물론 어떤 넘어짐은 깊은 상처를 남긴다. 다리가 부러져 평생 절뚝거리며 살아야 할 수도 있고, 절대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길 수도 있다. 잊고 싶고 떨치고 싶은 과거가 내 발목을 묶고 놓아주지 않을 수도 있다. 발목에 무거운 쇠사슬이 묶여 있다면, 그 사슬까지 함께 끌고 날아올라야 한다. 우리가 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 한 가지뿐이다. 만약 내가 세상이 모두 잊어줄 때까지 숨어 지내거나, 내 발목에 묶인 사슬이 저절로 풀릴 때까지 마냥 기다린다면, 영영 다시 날아오르지 못할 수도 있다. 



평생 넘어지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이나 비난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결점이나 오류 없는 신조차도 모든 이들의 찬사와 사랑을 받을 수는 없다. 전지전능한 신마저 이 순간 누군가에게는 비난당하고 누군가에게는 욕을 먹고 있다.


넘어져도 돼, 괜찮아!


사람은 누구나 넘어진다. 넘어질 수 있다. 넘어졌을 때 그대로 주저앉아 포기하는 대신, 일어나 다시 달려야 한다.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오르자. 나 스스로 묶어 놓은 것만 아니라면 그 누가 아무리 단단하고 무거운 쇠사슬을 내 발목에 묶었다 해도 날아오르는 나를 막을 수 없다. 사슬을 끌고 그대로 멋지게 날아오르자.



많이 늦었지만, 자전거 타기에 재도전해 본다. 여전히 회전만 하려 하면 넘어지지만,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넘어지지 않고 회전할 수 있는 날도 오겠지.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강연 신청 및 상위 1% 독서 커뮤니티 무료입장


https://link.inpock.co.kr/sohee_writer


이전 19화 내가 믿어주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