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
오늘도 거리에는 나를 비웃듯 여유 있는 표정으로 자전거를 타고 쌩쌩 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넓은 중국 땅에 자전거를 못 타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자전거가 내 옆을 쌩하니 지나갈 때마다, 나는 주눅이 든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중국에서 20년 가까이 살았음에도 나는 자전거를 못 탄다.
스무 살 때, 중국어를 배워 보겠다고 낯선 중국 땅에 첫발을 디뎠다. 그때는 정말 자전거가 차보다 많을 때였으니, 자전거를 못 탄다는 건 장애를 지닌 것과 다름없었다. 자전거를 배우려고 시도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한두 번 페달을 밟다 휘청하더니 쿵! 무릎은 까지고 상처 사이로 핏물이 배었다. 눈물이 핑 돌면서 자전거 배우기를 포기해 버렸다. 무릎에 난 상처가 따갑기는 했지만, 죽은 만큼 아팠던 건 아니었는데. 학교 다닐 때 반에서 유일하게 뜀틀을 못 넘었던 나는, 스스로 운동신경이 없다고 단정하며 살아왔다. 다시 일어나 봤자 금세 또 넘어질 거야. 그 넘어짐이 한두 번이 아닐 거란 짐작에 제대로 시도해 보기도 전에 눈앞이 캄캄해진 것이다. 자전거뿐 아니다. 스키도 눈밭에 몇 번 넘어지다 포기해 버렸다.
누구도 안 넘어질 수는 없지.
넘어지는 게 두려워 살아가는 데 편리와 재미를 주는 많은 것들을 놓치고 살았다. 세상 사람들은 다 쌩쌩 자전거를 타고 스키를 타는데, 나만 넘어진다고 생각했다. 혼자만은 아니라 해도 나처럼 계속 넘어지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고 믿었다. 넘어져서 아프기보다는 넘어질 때마다 창피했고, 엄청난 잘못처럼 느껴졌다. 넘어지는 건 잘못이 아니고, 누구나 넘어질 수 있다. 오히려 넘어진 그 순간이 바로 성공과 실패, 상승과 추락의 갈림길이 된다.
평생 자전거와 스키를 못 타고 사는 것쯤이야 인생에서 사소한 일일 수 있다. 단지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뿐. 하지만 몸이 아파 시험 준비를 못 한 채 시험을 볼 때, 내 앞에 앉은 우등생 친구의 답안지가 보이기에 딱 한 문제를 보고 적었는데 부정행위로 0점 처리되었다면 어떨까? 무심코 페이스북에 올린 문장 하나가 네티즌의 분노를 일으켜 하루아침에 악플이 백만 개쯤 달렸다면? 별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잘 나가는 친구에게 찍혀 하루아침에 전교생의 왕따가 된다면? 호기심에 딱 한 번만 해보려던 남배나 마약에 나도 모르게 중독이 된 걸 발견했다면?
아마 아무도 없는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거나 심지어 죽고 싶단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그런 일을 당할 때가 있다. 때로는 내 잘못으로, 때로는 고의가 아닌 실수로, 때로는 잘못도 실수도 아닌데 억울하게 넘어질 수 있다.
달리기 시합을 하다 갑자기 돌에 걸려 넘어졌을 때, 우리 앞에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 다시 일어나 뛰든가, 그대로 주저앉아 울든가.
'다시 일어나 뛰어도 어차피 꼴찌 할 텐데, 뭘' 당장은 일어나 다시 뛰나 그대로 주저앉아 있으나 결과가 같다고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그때 포기하고 주저앉은 사람과 다시 일어나 뛴 사람은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엄청난 차이를 보게 된다. 살다가 넘어지는 일은 결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살다 보면 수없이 다양한 상황에서 갖가지 모양으로 넘어지게 된다. 넘어질 때 다시 일어나려고 노력해 본 사람은 다음에 넘어질 때 다치지 않게 요령껏 넘어지는 법을 터득하거나, 넘어진 뒤 일어나는 과정에서 배운 지혜를 이용해 좀 더 빨리 일어날 수 있게 된다. 한 번 넘어진 걸로 필요 이상의 좌절과 낙심에 빠지면, 자칫 살아갈 희망과 힘마저 잃게 될 수 있다.
사람들의 시선이 영하 8도처럼 차가워도
난 잘 살아가 내 영화 같은 삶 날 부러워해 그래서 적이 많아
난 죽었다 살아나 난 다시 빛을 바라봐 날
잊을 때 즈음해서 난 귀신처럼 나타나
무슨 공연을 하든 내 콘서트로 만들어놔
살고 있는 전설 역사에 남아 난
박재범 'Clap' 가사 중
오래전 즐겨 듣던 노래 가사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원래 6명의 다른 가수와 함께 그룹을 이루고 있었지만, 한국을 비하하는 발언이 인터넷에서 뜨겁게 비난받자 결국 그룹을 탈퇴했다. 그 과정의 진실은 다 알 수도 없고 파헤쳐 알고 싶지도 않지만, 어쨌든 한창 잘 나가던 그는 갑자기 넘어지는 순간을 경험했다. 정말 악의를 가지고 큰 잘못을 한 것이든 오해나 음모로 피해를 당한 것이든, 크게 넘어졌던 그가 이 노래의 가사처럼 다시 일어나 툴툴 털고 더 도약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며 흐뭇했다.
살다 보면 내 곁에 아무도 없는 것 같은 깊은 고독과 외로움을 느낄 때가 온다.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을 때, 사람들의 시선이 영하 8도, 아니 영하 20도처럼 차갑게 느껴질 때, 마치 죽은 것 같이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 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나를 밝게 비추고 보호해 주던 나의 세계가 갑자기든 천천히든 무너져 버렸을 때, 희망이란 것 자체에 회의가 들 수 있다. 내게 다시 내일이란 게 있을까? 다른 기회가 정말 올까? 다시 바닥부터 쌓아 올리는 게 가능할까? 모든 걸 지우고 새롭게 시작하는 게 가능할까 등등.
벽은 높고, 두텁고, 강하고, 오만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세상 어떤 벽도 하늘 위까지 막혀 있진 않다.
안도현 <꿈> 중
죽을 것 같이 고통스럽던 순간도 지나간다. 바닥을 치면 다시 오르게 되어 있고, 모든 걸 잃고 바닥이 드러났다고 여겨져도 어느 순간 새로운 것들로 채워져 있다. 넘어져서 창피하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순간은 반드시 지나간다. 지나고 나면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다는 걸 깨닫게 된다. 저마다의 아픔을 통해 또 한 송이의 꽃을 가슴에 피우게 된다.
물론 어떤 넘어짐은 깊은 상처를 남긴다. 다리가 부러져 평생 절뚝거리며 살아야 할 수도 있고, 절대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길 수도 있다. 잊고 싶고 떨치고 싶은 과거가 내 발목을 묶고 놓아주지 않을 수도 있다. 발목에 무거운 쇠사슬이 묶여 있다면, 그 사슬까지 함께 끌고 날아올라야 한다. 우리가 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 한 가지뿐이다. 만약 내가 세상이 모두 잊어줄 때까지 숨어 지내거나, 내 발목에 묶인 사슬이 저절로 풀릴 때까지 마냥 기다린다면, 영영 다시 날아오르지 못할 수도 있다.
평생 넘어지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이나 비난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결점이나 오류 없는 신조차도 모든 이들의 찬사와 사랑을 받을 수는 없다. 전지전능한 신마저 이 순간 누군가에게는 비난당하고 누군가에게는 욕을 먹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넘어진다. 넘어질 수 있다. 넘어졌을 때 그대로 주저앉아 포기하는 대신, 일어나 다시 달려야 한다.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오르자. 나 스스로 묶어 놓은 것만 아니라면 그 누가 아무리 단단하고 무거운 쇠사슬을 내 발목에 묶었다 해도 날아오르는 나를 막을 수 없다. 사슬을 끌고 그대로 멋지게 날아오르자.
많이 늦었지만, 자전거 타기에 재도전해 본다. 여전히 회전만 하려 하면 넘어지지만,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넘어지지 않고 회전할 수 있는 날도 오겠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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