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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Mar 25. 2024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면 자신을 던져라

열정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등 서로를 연결해 줄 도구들이 엄청나게 늘었는데, 이상하게도 주위에는 외로움에 떠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외로움은 혼자가 아니면서도 혼자라고 느끼는 것이고, 혼자 있을 때보다는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때 더 외롭다고 느낄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외로움은 내 안에 있는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낼 곳이 없어 심심한 것의 다른 이름이다. 마음 맞는 책 속에 푹 빠져도 좋고,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해 보는 것도 좋다. 에너지를 쏟을 곳을 찾아 내 안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을 수 있다면 외롭다는 생각은 곧 사라진다.


우울증 약의 판매량도 계속 늘고 있는데,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자기 자신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내 상처, 나의 부족함, 내 공허, 내 불안... 모든 의식이 나 자신을 향하고 온통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것만큼 인간을 지치게 하는 일은 없다.



물론 적절한 고독은 이성과 감성 모두에 깊이를 더해주지만, 역시 지나친 것은 그게 무엇이든 좋지 않다. 외롭다고 느낀다면 나 외에 다른 어떤 것에 나 자신을 던져 넣어보자. 뭔가 몰입할 대상이 있다면 절대 외로울 수 없다. 에너지를 쏟고 몰입하다 보면 내 속에서 뜨거운 열정이 샘솟는 걸 느낄 수 있다. 



완전히 몰입해 춤을 추는 댄서를 보면 무아지경에 빠진 듯 춤을 춘다. 어느 순간 댄서는 그 춤 자체가 되어버린다. 자신의 모든 걸 다 던져 넣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어느 순간 그 그림 자체가 되고, 글쓰기에 자신을 던져 넣은 작가는 그 글 자체가 된다. 최고의 희열은 자기가 아닌 다른 무언가에 자신을 모두 던져 넣을 때,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을 수 있을 때 찾아오는 게 아닐까.


열정은 삶의 흐름에 왕성한 활동력을 공급하는 에너지이다. 우리의 아티스트는 아침의 고요 속에서 타자기를, 혹은 이젤을 만나기 위해 이른 새벽에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일은 훈련이라기보다는 비밀스러운 모험에 대한 어린아이의 동경과 같은 것이다.

줄리아 카메론 <아티스트 웨이> 중



처음으로 몰입의 기쁨을 알게 된 건 <아티스트 웨이>를 만났을 때다. 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일할고 있을 때였는데, 당시 아침 뉴스를 맡고 있어 출근 시간이 새벽 4시였다. 매일 새벽 눈을 뜨자마자 세 페이지씩 적는 모닝 페이지를 하기 위해 조금 더 일찍 일어나면서, 쓸데없는 일이라고 미뤄뒀던 수영을 배우고 불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미술도구를 사다 유화를 그리기도 했다. 아침 6시 뉴스와 저녁 생방송, 라디오 생방송과 녹화 방송 등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지만, 신기하게도 시간은 쪼개면 쪼갤수록 늘어났다.


하루는 무작정 회사 근처에 있는 실용음악학원을 찾아갔다. 주로 중고등학생들이 기타와 베이스, 드럼 등을 배우는 곳이었다. 학원 원장에게 드럼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더니, 원장을 비롯한 주위 학생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때 나는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드럼을 치려면 다리를 벌리고 앉은 채 두 발을 다 사용해야 한다는 아주 기본적인 상식조차 없었던 것이다. 모두가 고개를 가로저을 때, 나는 한술 더 떠 그해 안에 콘서트를 열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어디서 그런 무모한 용기가 튀어나온 걸까. 매일 새벽 모닝페이지를 쓰며 내 열정을 가슴에 모아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용기가 나온 거라 믿는다.



어떻게든 무대 위에서 연주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바로 방송국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찾아내 Y-NOT이라는 이름의 3인조 밴드를 결성하고 밴드의 리더가 되었다. 따다다다 따다다다, 똑같은 고무판을 수백, 수천 번 두드리는 일이 지루하기는커녕 오히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겼다. 내가 사라지자, 그 사라진 나는 반복되는 비트가 되기도 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움직이는 드럼 스틱이 되기도 했다. 황홀한 시간이었다. 지금도 가끔 음악을 듣다 강한 비트가 들려오면, 그때로 돌아간 듯 두근거린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세 사람이 스케줄을 맞추는 게 쉽지 않았지만, 모두 최선을 다해 공연을 준비했다. 시간을 쪼개 연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6밀리 카메라에 거금을 투자해 촬영과 편집까지 직접 해서 공연 인트로 부분에 Y-NOT을 소개하는 짧은 영상도 만들었다. 6개월 만에 카페 하나를 빌려 공연을 했다. 1부에 Nirvana, Deep Purple 등 외국 록음악을, 2부에 서태지, 자우림 등 한국 록음악을 열다섯 곡 정도 연주했다. 그날 초대를 받고 찾아온 사람 중에는 당연히 클래식 음악 공연일 거라 짐작하고 정장을 점잖게 차려입고 왔다 깜짝 놀란 이도 있다. 나는 바지와 운동화 대신 짧은 원피스를 입고 맨발로 드럼을 연주했다.



진정한 몰입에는 다른 어떤 것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오직 나와 열정의 대상만 있을 뿐. 사랑할 때 이 넓은 세상에 오직 나와 사랑하는 사람 둘만 존재하는 듯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남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누군가의 욕을 먹거나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내가 몰입하고 있는 대상을 하찮게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게 중요할까. 내가 나마저 잃고 빠져들어 더할 수 없는 행복을 느낀다는데. 다른 이들이 아무리 못생겼다고 놀려도 내 눈에만 연인이 예뻐 보이면 그만인 것처럼.



지난날을 돌아보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역시 그렇게 모든 걸 던져 넣고 열정적으로 뭔가에 몰입하던 때다. 그 후 수많은 이사와 이동이 있어 국경도 여러 번 건넜음에도 그때 썼던 스무 권 정도의 모닝 페이지 노트만은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한 번은 집에 혼자 있는데 건물에 화재경보기가 울린 적 있다. 도대체 뭘 들고나가야 하난 고민하다, 미련 없이 나머지를 모두 버리고 모닝페이지 노트만 챙겨 나갔다.



나를 잃어버리고 뭔가에 빠져든다고 하면, 술이나 담배, 마약, 게임, 섹스 같은 것들이 떠오를 수 있다. 물론 그런 것들도 몰입할 때 순간적인 즐거움을 주는 건 사실이지만, 중독되지 않을 수 있겠는지 스스로 먼저 물어야 한다. 뭔가에 중독되면 거기 묶인다는 뜻이고, 결국 노예가 된다는 말이니까.


사람도 분명 몰입의 좋은 대상이고 사랑할 때 충만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람 외에 지속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다른 대상이 꼭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든 자유롭게 나를 떠날 수 있는데, 그럼 한순간에 에너지를 쏟아붓던 대상이 사라져 버리니까. 사랑할 때는 열정적으로 하되, 사랑 외에 지속적으로 열정을 쏟을 수 있는 대상을 찾아야 한다.



내게는 그 대상이 글쓰기다. 휴화산처럼 죽은 듯 보였던 열정을 다시 한번 되살리고 싶었을 때, 문득 예전에 매일 쓰던 모닝 페이지가 떠올랐다. 내 안의 반짝반짝 빛나는 것들을 끌어내고 싶었다. '너는 재능이 없어 안 돼'라고 속삭이는 그놈 목소리와 하얀 백지를 마주하면 아무것도 쓸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 쓸 가치가 없다고 느껴지는 비루한 일상 등 몰입을 방해하는 것들은 차고 넘쳤다. 아직 내게 집중하고 있고, 나를 잃지 않아서다. 일단 나를 던져 넣고 달려들어가 몰입하는 순간, 그 모든 두려움과 걱정은 발 디딜 틈조차 없어진다.


열정을 영어로 passion이라고 하는데, 고난이라는 뜻도 있고 고난을 의미하는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람은 고통이 있어야 비로소 움직이고 행동한다. 고독에 치를 떨어본 사람만이 비로소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넣을 준비가 된다. 교과서 외의 다른 읽을거리를 금지한 학교에서 몰래 숨겨 놓고 읽는 소설에 더 빠져드는 것처럼, 허락되지 않는 것들에 우리는 더 끌리고 몰입한다. 혹시 몰입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있다면,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 부모가 반대하는 상대에 더 끌리고 사랑이 깊어지듯, 장애물이 내 열정을 태워줄 연료가 될 것이다.


어느 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헛산 것이 아니겠지?"

산도르 마라이 <열정> 중


죽도록 아내를 사랑했으면서도 아내가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자신을 배신하자 분노로 아내를 죽게 내버려 둔 주인공의 회한 어린 고백이다. 이 소설에서처럼 열정의 대상이 사람도, 예술 활동도 아닌, '죽은 아내를 향한 고통스러운 그리움'일지라도 불타오르는 정열, 열정을 체험해 봤다면, 그 열정으로 인해 어떤 일을 겪는다 해도 우리 인생은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모든 것을 던져 넣을 준비가 되었는가?


지금 외롭거나 고독하거나 권태롭다고 느낀다면, 나 외에 다른 것에 나 자신을 던져 넣고 몰입할 때가 된 것이다. 에너지와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뭔가를 찾아 몰입의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삶이 절대 헛되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노년의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뜨거워진다. 뜨거워진 가슴으로 모든 걸 던져 넣고 글 안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싶다. 이 비밀스러운 모험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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