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기
새벽 3시, 캄캄한 창가에 놓인 책상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지만, 정작 써야 할 글은 시작도 못하고 있다. 항상 바쁘고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보이는 사람 중에 실제로는 무기력한 사람이 꽤 있다.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무기력만 무기력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나 덜 중요한 일을 하면서 정작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하고 시간만 보내는 것도 무기력의 일종이다. 당장 써야 할 글이 있음에도 며칠째 딱히 필요하지도 않은 책을 하루종일 읽거나 이미 쓴 글 중 좋은 글을 골라보겠다면 원고의 숲 사이를 헤매며 길을 잃고 싶어 하는 나는 누가 봐도 중증 무기력증이다.
소설을 쓰고 싶다는 꿈을 처음 꾸기 시작한 건 열두 살 때쯤이었다. 지금은 제목도, 주인공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소설을 써 보겠다고 꽤 오래 붙들고 씨름했다. 소설가와는 거리가 먼 길을 돌고 돌다 (심리학을 전공하고 아나운서가 되어 방송을 하다, 갑자기 떠돌이 여행자가 되기도 하고, 돈이 떨어질 때쯤 빚을 내어 MBA를 한 후 경영 컨설턴트로 지내다 중국으로 건너와 아이 둘 키우는 주부가 되었다) 마흔 즈음에 낯선 길로 들어서는 건 쉽지 않았다. 서너 살 먹은 아기들을 돌봐야 하는 주부가 글을 쓰기 위한 시간을 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처럼 보였으니까. 두 시간만 일찍 일어나 보자, 하고 시작한 새벽 세 시 기상이 이제는 습관이 되었다. 알람이 없어도 새벽 세 시가 되면 눈이 떠지고 책상 앞에 가서 앉을 수 있다.
이렇게 소설을 쓴 지 10년이 넘었다. 처음 단편소설을 써 보자 했을 때는 신춘문예 접수 마감을 한 달쯤 남겨 놓은 시점이었다.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에 단편 하나를 탈고하고 당장이라도 등단할 것처럼 자신감이 하늘을 치솟았다. 처음 떨어졌다는 걸 알았을 때, 한 달 이상 한 자도 쓰지 못할 만큼 좌절했다. 겨우 마음을 추슬러 다시 쓰기 시작한 후, 지난 10년 여의 시간 수십 번 넘게 응모에 떨어졌다. 덕분에 책 네 권을 출간한 에세이 작가는 되었지만, 아직도 소설가의 길은 멀기만 하다. 나는 말하자면 미등단 소설가다. 이미 써 놓은 소설이 제법 되지만, 단 한 편도 독자에게 읽힐 수 없는 서러운.
분명 어려운 길이란 걸 알고 시작했는데, 응모에 떨어질 때마다 마음이 다치는 걸 막을 수 없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시작하기가 쉽지 않다. 얼마 전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바뀐 뒤, 몇 달째 소설이라곤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있다. 이제 진짜 포기할 때가 된 게 아닌가 싶어서.
무슨 일이든 하다 보면 항상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극에 달하는 시점이 있다. 그런 유혹을 느끼는 건 절대 나 혼자가 아니다. 실제로 목표에 대한 접근 강도와 도피 강도를 연구한 심리학 이론에 따르면, 목표 달성이 얼마 남지 않은 그 시점에 포기하고 싶다는 도피 강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고 한다. 말하자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극도로 심해졌을 그때가 실은 목표 달성을 코앞에 두고 있는 시점일 수 있다. 결국 죽어도 안 될 것 같아 포기하고 싶은 그 유혹을 잘 넘긴 사람만이 성취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는 말이다. 거센 바람 속에서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가녀린 불꽃을 숨죽이며 끝까지 지켜나가는 과정과 같다고 할까.
여러 번 뛰어 본 마라토너들이 제 아무리 연습과 피나는 훈련을 했다 해도 온몸에 갖고 있던 모든 영양과 글리코겐 등이 바닥나는 시점인 35km 지점을 넘을 때, 다리 힘이 풀리고 금방이라도 주저앉고 싶은 강력한 유혹을 경험한다. 정말 이대로 더 달리다가는 내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두려움을 느끼게 되니 그대로 주저앉는다고 해도 그 누구도 포기하는 마라토너를 비난할 수 없다. 하지만 극심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주저앉고 싶은 유혹을 물리친 사람만이 완주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퍼스트 포지션>은 발레리나로 성공하기 위해 대회 준비를 하는 댄서들을 취재한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오랜 연습으로 발가락이 기형적으로 변형된 한 댄서의 말이 인상에 남는다.
내가 참을 수 있는 한계까지 다 참고 나서 더 이상 못할 것 같다는 순간부터 다섯 개를 더 하고 그만둬요.
한계까지 견디는 것도 쉽지 않은데, 더 이상 못할 것 같은 순간부터 다시 다섯 개를 더한다니. 그동안 얼마나 나 자신에게 속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조금만 더 달리면 죽을 것 같은 마라톤의 35km 지점을 넘어가도 죽지 않고 완주할 수 있고, 이게 정말 내 한계라 더 이상은 못해, 하는 순간에도 다섯 개를 더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게 내 한계라고 외치는 내 안의 소리를 들을 때, 그보다 더 큰 소리로 '아니야, 이제부터 딱 5분만 더 참아 볼래!' '아니야, 지금부터 딱 한 번만 더 해 볼래.'라고 외쳐보면 어떨까.
담배 끊기도 마찬가지란 이야기를 들었다. 다시 피우고 싶어 미칠 것 같은 그 순간부터 딱 5분만 참으면 된다. 5분이 지나면 절박한 갈망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그토록 피우고 싶은 담배를 평생 피우지 말고 참으라고 하면 견디기 어렵겠지만, 딱 5분만 참으라고 한다면 그 정도는 해볼 만하지 않을까. 42.195km라는 어마어마한 거리의 마라톤을 처음부터 해보라면 엄두가 안 나는 일이지만, 매일 100미터씩만 늘려간다고 생각하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을까.
<아웃라이어>에서 말콤 글래드웰은 통계를 분석해 설명하는 학자답게 수치화해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성공은 보통 사람이 30초 만에 포기하는 것들을 22분간 붙잡고 늘어지는 끈기, 지구력, 의지의 산물"이라고. 어마어마해서 엄두가 나지 않는 일들도 결국은 분 단위 정도의 싸움인 셈이다.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다시 소설 쓰기를 시작하지 못하고 엉뚱한 일만 하고 빙빙 돌고 있었는데, 딱 두세 줄만 써 봐야겠다. 엉터리 소설이라도 관계없고, 한 편을 다 쓰지 못하고 몇 줄만 끼적이다 만다고 해도 스스로를 비난하지 않으면서.
노트북을 덮고 포기하고 싶을 때, 그때부터 딱 5분만 글을 써볼까. 그 5분의 시간들이 모여 언젠가는 나를 진정한 소설가로 만들어주겠지. 지금부터 딱 5분만!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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