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소희 Jun 03. 2024

만일 사흘 동안 볼 수 없게 된다면

감각

보지 못하는 남자와 듣지 못하는 여자의 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오감 중 하나인 시각과 청각을 각각 사용할 수 없을 때, 촉각을 중심으로 나머지 감각들을 풍성하게 사용해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감각을 사용하지 못할 때의 소통 가능성을 실험하고 싶었다. 구상을 시작한 지 반년이 넘어서도 쓸 수가 없었다. 인물들의 캐릭터도 설정하고 대략의 줄거리 구성도 마쳤는데, 도무지 쓸 수가 없었다. 단순히 눈을 감거나 귀를 막는다고 맹인과 농인을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들의 어둠과 적막을 이해할 수 없다. 시각장애인의 감각을 느껴보고 싶어서 길을 걷다 갑자기 눈을 감았다.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빛들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출렁이며 빛과 그림자가 눈동자 위에서 바쁘게 춤을 추었다. 눈을 감아도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농아의 적막을 경험해 보고자 귀를 막아 봤지만, 잠수했을 때처럼 귓속의 소리들이, 내 심장 박동들이 더욱 크게 들려왔다. 귀를 막아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까만 어둠과 깊은 적막은 결코 원한다고 경험해 볼 수 없다는 걸 그때 깊이 깨달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어, 간접 경험을 통해 이해할 수 없는 그 세계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던 중, 헬렌 켈러의 에세이를 만났다.


보지 못하는 남자와 듣지 못하는 여자의 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얼마 전, 친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마침 숲 속을 오랫동안 산책하고 돌아온 참이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별거 없어.' 내가 그런 대답에 익숙해지지 않았다면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눈이 멀쩡한 사람들도 실제로는 보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답니다. 어떻게 한 시간 동안이나 숲을 거닐면서도 눈에 띄는 것을 하나도 보지 못할 수가 있을까요? 나는 앞을 볼 수 없기에 다만 촉감만으로 흥미로운 일들을 수백 가지나 찾아낼 수 있는데 말입니다. 오묘하게 균형을 이룬 나뭇잎의 생김새를 손끝으로 느끼고, 은빛 자작나무의 부드러운 껍질과 소나무의 거칠고 울퉁불퉁한 껍질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집니다. 봄이 오면 자연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첫 신호인 어린 새순을 찾아 나뭇가지를 살며시 쓰다듬어 봅니다. 꽃송이의 부드러운 결을 만지며 기뻐하고, 그 놀라운 나선형 구조를 발견합니다. 자연의 경이로움은 이와 같이 내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운이 아주 좋으면, 목청껏 노래하는 한 마리 새의 지저귐으로 작은 나무가 행복해하며 떠는 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시원한 시냇물도 즐겁지만 수북하게 쌓인 솔잎이나 푹신하게 깔린 잔디를 밟는 것도 화려한 페르시아 양탄자보다 더 반갑습니다. 계절의 장관은 끝없이 이어지는 가슴 벅찬 드라마이며, 그 생동감은 내 손가락 끝은 타고 흐릅니다.

헬렌 켈러 <내가 만일 사흘 동안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면> 중


헬렌 켈러


뭔가를 훔쳐 먹다 들킨 것처럼 부끄러웠다. '별거 없어'라고 답하는 그 친구가 바로 나였으니까. 눈을 뜨고 귀를 열어놓고 다니면서도 별 걸 보지 못하고, 별 걸 듣지 못한다는 사실에 뜨끔했다. 모든 감각을 사용할 수 있는 나보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헬렌 켈러가 묘사한 것들이 얼마나 풍부한지 보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꽃잎의 나선형 구조와 행복해하는 나무의 떨림이라니.



눈과 귀가 있어도 집중하지 않고 모든 걸 무덤덤하게 흘려버린 건 감사하는 마음이 없어서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뭔가를 잃고 박탈당하기 전에는 그 고마움을 깨닫기 힘든 존재다. 시한부 인생으로 앞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이 오직 사흘뿐이라면, 하나라도 더 보고 더 듣고 느끼려고 노력하겠지. 남은 사흘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평생 후각을 상실한 채 살아야 한다면, 정말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어쩌다 코감기에 걸려 코가 꽉 막히면 당연히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다. 코가 막히면 냄새뿐 아니라 음식의 풍미도 충분히 느끼지 못해 입맛을 잃게 된다. 평소에 맛있게 먹던 오렌지나 케이크를 먹었는데 아무 맛도 향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어떨까. 잠깐 코가 막힐 때도 삶의 재미를 많이 잃게 되는데, 평생 후각을 상실한 채 살아야 한다면, 정말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촉각이 사라진다면 아마 영영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겠지


잠시 부분 마취로 촉각을 잃었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분명 내 몸의 일부인데 내 것이 아닌 듯했던 이질감. 누군가의 따뜻한 손을 잡거나 포옹을 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부드럽게 키스해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촉각을 잃는다는 건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되고 소외되는 느낌일 것이다. 촉각이야말로 사랑을 가장 깊이 있게 전달하는 감각인데, 촉각이 사라진다면 아마 영영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겠지.


하나하나의 감각들을 부주의로 더 빨리 잃지 않으려면 좀 더 건강하게 감각의 날을 벼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이가 들어가니 노안이 찾아오고 자주 눈이 침침해진다. 시력을 비롯한 하나하나의 감각들을 부주의로 더 빨리 잃지 않으려면 좀 더 건강하게 감각의 날을 벼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두운 조명 아래서 글 쓰지 않고 밝은 데서 쓰도록 노력해야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작은 변화도 모두 놓치지 않고 보고 싶으니까.


한 번에 하나의 감각에 집중해 느껴보며 감각들이 무뎌지지 않게 단련해야 한다


감각은 쓰지 않으면 점점 퇴화한다. 사람의 코는 원래 수천 가지의 냄새를 구분할 수 있었는데, 도시 문명 생활을 오래 하면서 거의 그 기능을 쓰지 않다 보니, 지금은 겨우 수십 가지의 냄새밖에는 맡지 못한다. 무심코 살아가다 보면 많은 감각을 놓치기 쉽다. 특별히 한 번에 하나의 감각에 집중해 느껴보며 감각들이 무뎌지지 않게 단련해야 한다. 10분간 눈을 감고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해 보고, 산에 올라가 나무껍질과 풀, 흙을 손으로 만지거나 맨발로 밟아본다. 꽃시장에 가서 눈을 감고 다양한 꽃향기를 구분해 본다든지 하면서.



맹인 소년과 농아 소녀의 사랑 이야기는 결국 분량을 확 줄려 단편소설 <더듬다>에 액자 형식으로 집어넣는데 그쳤다. 그 글을 쓰면서 누릴 수 있던 감각들에 더 감사하고 조금 더 민감하게 집중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당신은 몇 가지 감각이나 사용할 수 있는가. 사용 가능한 감각기관을 모두 활짝 열어 놓고 아름다운 세상을 한껏 받아들이자.


감각기관을 모두 활짝 열어 놓고 아름다운 세상을 한껏 받아들이자.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강연 신청 및 상위 1% 독서 커뮤니티 무료입장, 1:1 글쓰기 코칭 신청


https://link.inpock.co.kr/sohee_writer/


이전 27화 자꾸 쪼그라드는 기억의 보퉁이를 어떻게 꾸밀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