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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Jun 10. 2024

쓸모없는 것들을 배우고 사유하라고?

無用

비가 금방이라도 흩뿌릴 듯한데, 아직은, 아직은 하면서 머뭇거리고 있는 목요일 저녁입니다. 꼭 제 마음 어느 한 풍경 같군요.



이렇게 시작하는 이메일을 받은 어느 날, 알레그로로 연주되던 삶이 갑자기 쉼표를 찍고, 안단테로 천천히 전환했다. 특이할 것 전혀 없는 날씨로 시작하는 인사말이 어찌나 생경하게 느껴지던지, 내 삶에 브레이크를 걸 때가 됐다는 걸 직감했다.


읽는 상대에게 전혀 쓸모없는 시시콜콜하고 사사로운 이야기를 담은 편지


아주 오래전 정성 들여 편지지를 골라, 손으로 편지를 쓰고, 편지 봉투에 넣어 우체통에 넣는 그런 전통적인 편지를 매일 쓴 적 있다. 아주 오랜 시간 썼으니, 그 내용이야 읽는 상대에게 전혀 쓸모없는 시시콜콜하고 사사로운 이야기들이었다. 때로는 하늘의 색깔이나 구름 모양을 묘사하는데 편지지 한 장을 다 채웠다. 그런 게 중요하다는 걸 알던 시절이었다.


효율과 경제적 가치만 중시하는 세상


효율과 경제적 가치를 최상으로 여기는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 종이에 쓰는 편지 따위 잊은 지 이미 오래고, 이메일을 쓸 때조차 쓸모없는 인사말을 생략한 채, 요점만 짧게 쓰는 버릇이 생겼다. 첫 줄만 읽어도 왜 썼는지를 알게 해줘야 했으니까. 보고할 때도 Answer First를 외치며 결론부터 이야기하라고 닦달했다. 누군가 대화를 부드럽게 하려고 결론과 관계없는 내용에서 에둘러 들어오면 '도대체 요점이 뭐야' 하며 짜증을 낼 정도로 인내심을 잃어갔다. 금보다 소중하다는 내 시간을 쓸모없는 이야기로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금보다 소중하다는 내 시간을 쓸모없는 이야기로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쓸모 있는 정보만 모으고, 꼭 필요한 지식만 배우고, 효율적으로 일하기에도 시간은 없고 할 일은 너무 많다. 입시에 필수가 아닌 과목은 건너뛰어야 하고, 위대한 문학 작품들도 줄거리와 주제를 요약 정리해 놓은 요약본들이 많으니 굳이 시간 낭비하며 다 읽을 필요는 없고. 평생 함께할 배우자는 결혼정보회사에서 내 조건과 요구에 맞춰 최적의 파트너를 뽑아 줄 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해 이렇게 바쁘게 살아가는 걸까? 효율이라는 허울 좋은 목표는 우리 삶을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으로 만드는지.


"그렇게 빨리 흥정을 끝내다니, 당신은 그녀를 모욕한 거에요"


한 여성이 나에게 다가와 아주 오래된 발리 책을 권했다. 말린 야자수 앞에 글씨를 쓰고 앞뒤로 나무 테를 두른 책이었다. 그녀는 낮은 가격을 제시했다. 나는 그 가격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약간 더 얹어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깜짝 놀라 거의 적대감을 드러내며 나를 바라보고는 사라졌다.

'그 여자에게 어떻게 그런 고통을 줄 수 있어요? 흥정을 했어야죠. 그 책은 그녀의 것이었어요. 그런데 돈이 필요해서 자기 소유물과 헤어져야 한 거예요. 그 여자에게는 작별을 끌고 늦출 권리가 있었다고요. 그렇게 빨리 흥정을 끝내다니, 당신은 그녀를 모욕한 거에요.'

페터 빅셀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중


어른에게도 이런 쓸모없는 놀이가 절실하다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웃는 모습이 어찌나 행복해 보이던지, 같이 좀 웃어보려고 들여다보면 정말 쓸데없는 짓을 하며 무의미한 것들에 웃고 있었다. 인형을 거꾸로 세웠다, 옆으로 세웠다, 바로 세웠다, 하면서 변하는 모습을 보고 깔깔거린다든지, 블록 몇 개를 쌓아 올렸다 툭 쳐서 넘어지는 모습을 보고 자지러진다든지.


행복은 어쩌면 이런 쓸모없는 것들에, 무용한 것들에 있는 건 아닐까.


어른에게도 이런 쓸모없는 놀이가 절실하다. 돈을 벌기 위해,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무엇을 성취하기 위해 등등 말고, 목적 없이 보이지만 그저 즐거워서 하는 일들 말이다. 세상에는 일 말고는 어디서 기쁨을 찾아야 하는지 전혀 모르거나 생각해 볼 여유조차 없는 사람들이 넘쳐 난다. 내가 마흔 넘어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전공도 안 할 건데 그걸 왜 배워요? 학교나 직장, 세상에서 가르치는 모든 지식은 교육이나 통치상 목적을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니 탈출구가 있어야 한다. 효율과는 거리가 멀지만, 순수하게 삶의 기쁨을 위해 쓸모없는 것들을 보고 배워보자. 일과 상관없는 것에서 나만의 기쁨과 즐거움을 찾아보자.


들꽃을 보며 어린아이마냥 기뻐하는 아주머니들을 보면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방송국에서 일할 때 가끔 시골로 야외 촬영을 나갈 때가 있다. 땅 빛으로 그을린 건강한 살갗의 아주머니들이 나를 옆에 앉혀 두고 여러 가지 들꽃의 이름을 알려 준 적 있다. 미나리아재비, 개미자리, 갯완두, 갯무 등. 노랗게 또는 연보랏빛으로 바람에 하늘거리는 들꽃들, 밟아도 끄떡없이 다시 일어나는 끈질긴 생명력의 들꽃을 보며 어린아이마냥 기뻐하는 아주머니들을 보면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하얀 살갗에 달려드는 벌레들이 성가시기만 했던 나는 왜 내게는 아주머니들이 보이는 그런 감수성이 없는가 질문했다. 쓸모없는 들꽃의 이름에 관심을 갖고, 바람이 불 때마다 가녀린 들꽃과 함께 흔들리기에는 내 삶이 너무 복잡하고 분주했다.


들꽃의 이름을 혀끝에 놓고 굴리며 발음하다 보면 입술이 간질거리며 피리 소리가 들려온다


바쁘다고 외면해 버렸지만, 사실 기쁨을 더 풍성하게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지식들, 당장 이익은 없어도 삶을 깊이 있고 아름답게 해주는 이야기들이 세상에는 많다.


두 남자 중 누구도 선택하지 못하고 데이지 꽃이 된 베리디스


꽃시장에서 살 수 없는 들꽃의 이름을 혀끝에 놓고 굴리며 발음하다 보면 입술이 간질거리며 피리 소리가 들려온다.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두 남자 중 누구도 선택하지 못하고 데이지 꽃이 된 베리디스를 떠올리면, 찰랑거리는 호숫가에 피어 있는 데이지의 고뇌가 내 고뇌가 되는 듯하다.


수잔 발라동은 어떤 여인일까


르누아르, 드가, 샤반, 로트레크의 그림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고, 작곡가 에릭 사티의 마음을 흔들어 <난 널 원해>를 작곡하게 만든 발라동은 어떤 여인일까. 본인이 그린 자화상과 화가가 아닌 에릭 사티가 그린 초상화를 포함해 각기 다른 화가의 그림과 작곡가의 음악 속에 나타난 발라동을 보고 듣다 보면, 한 사람의 삶은 그 한 사람만의 삶이 아님을 깨닫는다. 내가 누군가의 삶에 끼어들어 전혀 다른 삶의 단면을 살 수 있음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사연을 알고 나면, 뒤 프레의 첼로 연주가 왜 그렇게 절규하듯 절절한지 비로소 알게 된다


근육이 천천히 마비되어 죽는 병, 성공에 대한 욕심으로 무리한 연주 스케줄에 완벽한 연주를 요구하는 지회자 남편, 극심한 우울증으로 언니에게 형부를 연인으로 빌리는 사연을 알고 난다면, 뒤 프레의 첼로 연주가 왜 그렇게 절규하듯 절절한지 비로소 알게 된다.


세상에는 쓸모는 없지만 삶의 깊이를 더해주는 무용한 지식이 여전히 많다. '빛의 화가' 모네의 그림에 가장 어울리는 음악은 어떤 음악일까. 뱃사람을 유혹해 바다로 빠뜨리던 세이렌은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


세이렌은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


낡은 싸구려 소설과 미키마우스 만화책 틈에서 어떤 책 두 권을 발견...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로베르트 발저라는 작가의 책이었는데, 나는 무척 깊은 감명을 받았다. 독일어 선생님에게 발저를 알고 있는지 질문한 것은 지독한 실수였다. 선생님은 발저를 몰랐고, 나를 안 좋게 생각했다. 몰라도 되는 것을 유식한 사람에게 질문한 나는 무식한 사람이 되었다.

-페터 빅셀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중



쓸모없는 지식이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릴 때


여전히 세상은 분주하고 쓸모없는 지식이나 몰라도 되는 지식을 얻고자 질문하면 무식하고 비생산적인 인간으로 비난받기 쉽다. 게다가 정보의 폭발,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정말 쓰레기 같은 지식인지 쓸모없어 보여도 나에게는 보석이 될 수 있는 지식인지 분별하는 일은 안 그래도 무거운 업무 스트레스에 새로운 피로를 가중시킬 수 있다. 효율을 놓고, 유용한 정보를 놓치는 걸 아까워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효율을 떠나 내게 인연이 닿은 지식들만 만나고 사유하겠다고 생각한다면, 피로를 느끼지 않아도 된다. 쓸모없는 지식이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릴 때, 그 안에 숨은 빛을 발견하고 문 열어줄 수 있으면 된다. 그로 인해 풍성해진 삶을 누릴 수 있는 사람, 그가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유용한 지식은 필요할 때, 어디서 찾으면 되는지만 알면 검색해서 취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쓸모없는 지식은 애초부터 당장의 이익과 관련 없기에 일상의 아주 사소한 것부터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굵직굵직한 주제까지 삶 전체를 스펙트럼으로 놓고 사유할 수 있다. 쓸모없는 것들에서 파생되는 사유로부터 우리는 삶의 기쁨을 찾고, 지혜를 발견하고, 또 삶의 철학을 찾아낼 수 있다.


인생에서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쓸모없는 것들이라는 삶의 아이러니. 그래서 삶이 살아볼 만한 것이 아닐까.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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