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소희 May 27. 2024

자꾸 쪼그라드는 기억의 보퉁이를 어떻게 꾸밀까?

기억

반갑게 인사하는 누군가를 만났다. 누구지? 정황상 어렸을 적 친구나 또는 한두 번쯤 만났던 지인인 모양인데, 까맣게 잊혀 생각나지 않았다. 당연히 기억할 거라 여기며 묻는 그와 관련해 단 한 조각의 기억도 끄집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놀랍고 또 미안했다.


단 한 조각의 기억도 끄집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미안했다


모든 것이 쉬웠고, 모든 것이 가벼웠다. 어쩌면 그 때문에 기억의 보퉁이가 그렇게 조그만지도 모르겠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책 읽어주는 남자> 중


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 한 장면


책을 읽어주고, 같이 샤워하고, 사랑을 나누고, 나란히 눕는 의식을 매일 같이하던 서른여섯 살의 한나가 갑자기 사라졌다. 또래 친구들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과 갑자기 사라진 한나로 인해 생긴 그리움과 분노, 죄의식과 불신 등 극렬한 감정으로 모든 일에 심드렁했을 미하엘. 의미를 찾지 못했던 미하엘의 소년 시절, 기억의 보퉁이가 조그만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내 인생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기억들의 집합


많은 이들이 자기 삶을 말할 때, 소설 몇 권쯤은 쓸 수 있다고 한다. 내 인생은 내가 겪어온 경험의 총합이 아니라, 내가 기억하고 있는 기억들의 집합이다. 내가 살면서 경험한 일을 모두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의 기억은 왜곡이 많다.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고 믿었던 사건도 누군가가 새로운 정보를 주면 슬그머니 재편집되어 변한다. 실제로 기억의 이런 편집 기능은 이로운 점이 많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지독한 고통의 순간들이 때로는 정말 기억나지 않기도 하니까.


기억 자아는 이야기를 좋아한


기억 자아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에피소드 단위로 기억을 저장한다.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추억들은 내가 겪은 그대로가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내가 만든 이야기라는 말이다. 영화를 기억할 때도 지루한 부분은 모두 지우고 하이라이트만 기억하는 것처럼. 이야기 모드에서 에피소드는 대체로 몇몇 중요한 순간들만 남는다. 시작과 절정, 결말만 남고, 지속 시간은 종종 무시된다.


예를 들어, 내가 수술을 두 번 했는데, 첫 번째 수술은 1시간 안에 끝났지만 끝나기 직전에 극심한 고통을 경험했다고 하자. 두 번째 수술에서는 수술 시간이 3시간이나 되었고 수술 중간에 한 번 극심한 고통이 있었지만 마지막에 고통 없이 마무리되었다. 어느 수술을 더 고통스럽게 기억할까? 보통 사람들은 첫 번째 수술을 더 고통스럽게 기억한다. 고통의 지속 기간은 기억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마지막이 어떻게 끝났느냐가 기억에 더 강한 영향을 준다. 잠시 이야기가 옆으로 샜는데, 행복한 기억으로 남기고 싶다면, 마무리를 기분 좋게 하는 게 중요하다.


뇌는 자기 마음대로 내 기억을 편집해 저장한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뇌는 자기 마음대로 내 기억을 편집해 저장한다. 또 꺼내고 싶은 것만 보여준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심리학 이론들에 따르면 내 인생에서 결정들을 내리는 자아는 보통 '기억 자아'라고 하는데, 미래에 대한 제어권이 현재의 자아가 아니라 기억 자아에 있다. 행복하고 긍정적인 미래를 위해서는 먼저 행복하고 긍정적인 기억을 쌓아야 한다.


제멋대로 편집된 기억을 통해 우리는 새롭게 시간을 느끼는데, 기억 속에 저장된 내용이 많으면 그 시기가 길게 느껴지고, 전혀 기억할 게 없으면 그 시기가 짧게 느껴진다. 재미있는 추억이 많았던 시기는 짧아도 길게 느껴지고, 매일 똑같은 일만 반복하며 살았던 시기는 그게 몇 년이라도 짧게 압축되어 버린다.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고 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가슴 설레는 기억이 적어지니까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껴진다. 기억에 특별히 저장할 내용이 없으니, 쌩하니 지나가 버리는 것.


중년에 들어선 후부터는 잘 늙지 않는 사람과 빨리 늙어버리는 사람의 차이가 현격해진다


어리고 젊을 때는 고만고만하게 자라는 것 같더니 중년에 들어선 후부터는 잘 늙지 않는 사람과 빨리 늙어버리는 사람의 차이가 현격해진다.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건 삶이 재미없는 까닭이다. 풍성한 이야깃거리가 있는 사람은 확실히 젊게 살 수 있다.


우리는 대부분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반복되는 삶을 살아간다. 일상에서도 기억에 남을 만큼 재미있거나 감동적인 에피소드들을 조금씩 만들어가는 일은 중요하다. 모두 지쳐서 무표정한 얼굴로 퇴근하는 전철 안에서 누군가에게 따뜻하게 말을 걸거나, 하루쯤 마음먹고 차나 전철 대신 걸어서 등교나 출근을 해본다든지, 평소 다니던 길 대신 다른 길로 조금 돌아가 본다든지. 어제와 다른 날로 오늘을 만들 아이디어는 상상력을 조금만 발휘한다면 무궁무진할 것이다.


조금만 신경 써서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평소에 놓쳐버린 많은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있다


그저 조금만 신경 써서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평소에 놓쳐버린 많은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있다. 한밤중에 불을 끄고 텔레비전도 끄고 모든 소리 나는 것들을 잠재운 뒤, 귀를 기울여 본 적 있는가. 벌레 우는 소리며 나뭇잎끼리 몸 비비는 소리, 바람이 지나가며 던지는 이야기. 아마 평소에는 전혀 듣지 못했던, 아니 한 번도 들리지 않았던 소리들이 갑자기 들려올 것이다. 바쁘고 시끄러운 생활을 잠시 멈춰 보는 것. 그 짧은 시간에 우리가 놓친 많은 것들을 우리 삶과 기억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그럼에도 기억은 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언제든 장난을 치고 싶어 할 테니, 단 한 줄이라도 매일 기록하는 것이 좋다. 꼭 일기의 형식일 필요는 없다. 그날그날 발견한 것들이나 경험한 것, 생각난 것들을 적어놓아 보자. 나중에 시간이 흐른 뒤 보며 깜짝 놀랄 것이다. 뇌가 내 허락도 없이 지워버린 소중한 기억이 너무 많아서.


열네 살에 쓴 일기장에서 내 인생 최고로 힘들었던 하루라고 쓴 글을 발견


언젠가 열네 살 때 쓴 일기장에서 내 인생 최고로 힘들었던 하루라고 쓴 글을 발견했다. 아무리 기억하려고 해도 그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누가 볼까 겁났는지 일기장에도 있었던 일을 자세히 쓰지 않고 생각이나 느낌만 간단히 적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열네 살 인생 최고로 힘들었던 날은 결국 영원히 풀 수 없는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몇 가지 추측은 해볼 수 있겠지만, 내 기억만 더 왜곡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보다 훨씬 힘든 일이 그 뒤로 많았기에 열네 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일쯤은 기억 저편으로 까맣게 사라져 버렸다. 당시 삶이 힘들다고 느꼈다는 그 감정만큼은 기억이 지워졌다 해도 기록으로 남았다. 나이가 한참 든 나는 그때의 기록을 읽는 새로운 경험을 기억의 보퉁이 안에 집어넣는다.



인생의 구렁텅이에 빠졌던 시절, 어느 날 돌아보니 언제부턴가 글쓰기를 멈췄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글쓰기가 모든 걸 해결하는 마법의 주문이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기억이 제멋대로 누락시킨 소중한 정보들을 기록에서 찾을 수 있을 때, 훨씬 더 지혜롭고 사려 깊은 판단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억력이 예저만 못하다고 느낀다면, 깜박깜박하며 많은 것들이 사라져 버린다면, 지금이 바로 글을 써야 할 때다.


기억의 보퉁이 안에 어떤 이야기들이 들어 있는지 들여다보자. 앞으로 남은 인생 동안 얼마나 더 재미있고 풍성한 이야기들이 그 보퉁이 안에 담기게 될까. 물론 큰 고통 없이 행복한 일만 가득하길 바라지만, 한편 인생을 성숙시키는 건 고통을 동반한 굵직굵직한 사건임을 알기에 무조건 고통 없는 삶을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힘든 시간을 보낼 때도 <책 읽어주는 남자>의 미하엘처럼 그 외 모든 일이 쉽고 가벼워져 그 시절 기억의 보퉁이가 쪼그라드는 일만은 없었으면 한다. 매 순간 사소하게 넘길 수 있는 작은 에피소드들과 그 시간을 소중히 그러담고 싶다. 인생의 모든 단계에서 아름답고 풍성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살아갈 수 있기를 꿈꾼다.


인생의 모든 단계에서 아름답고 풍성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살아갈 수 있기를


오늘은 기억의 보퉁이를 열어 햇빛에 바삭하게 말리고 바람도 쐬여 주자. 기억의 보퉁이를 어떻게 꾸밀지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강연 신청 및 상위 1% 독서 커뮤니티 무료입장, 1:1 글쓰기 코칭 신청


https://link.inpock.co.kr/sohee_writer/


이전 26화 끝인가 싶을 때 극한에 도전하자!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