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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May 30. 2024

작가는 진실을 위해 거짓말을 한다

허구 vs. 사실

무대 위에서 칼을 휘두른 적 있다. 남편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아내가 되었다.


클리타임네스트라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은 출정 10년 만에 승전 소식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런 아가멤논을 기다리던 건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복수의 칼. 아가멤논이 트로이를 이기기 위해 자신과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딸인 이피게니아를 희생 제물로 바쳤기 때문이다. 


아가멤논


딸을 잃은 어머니의 고통과 슬픔.  남편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 전쟁 승리라는 목적을 위해 사랑하는 딸을 죽인 남편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것을 정의의 실현이라고 여기는 아내. 열일곱 살의 내가 해석한 클리타임네스트라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꾸고 있었다. 아가멤논을 살해하는 클리타임네스트라 역을 실감 나게 연기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칼로 찔렀을 때 붉은 피가 철철 흘러나오는 잔인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대본을 외우고, 의상을 만들고, 무대에 올릴 연극을 준비하면서, 내 머릿속은 진짜 피가 흐르는 실감 나는 연기에 꽂혔다.


드디어 추운 겨울 공연은 시작되고, 많은 사람들이 관객석을 채웠다. 무대 가운데 아가멤논을 꽁꽁 묶어 무릎 꿇어 앉혀 놓고, 딸을 잃은 어미의 고통과 슬픔을 토로하는 독백을 이어갔다. 분노가 극에 달했을 때, 나는 칼을 높이 들었다가 아가멤논을 찔렀다. 어렵게 준비한 '진짜 피'가 담긴 비닐봉지를 터뜨렸다.


아가멤논의 몸에서 붉은 피가 쏟아져 나오며 무대 위에 선혈이 낭자하기를 기대했다


선혈이 낭자하다는 표현이 있다. 국어사전에 선혈이 '생생한 피'로 정의되어 있는데, 그야말로 붉은 피가 처참하게 뿌려져 있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고통에 일그러진 여인이 복수의 칼을 휘둘렀을 때, 마침내 아가멤논의 몸에서 붉은 피가 쏟아져 나오며 무대 위에 선혈이 낭자하기를 기대했다. 어렵게 구한 진짜 소의 피, 짐승을 잡아서 받아낸 피인 선지가 그야말로 우리가 먹는 '선짓국'의 굳은 선지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당황한 나는 젤리처럼 말캉하게 굳은 검붉은 선지 덩어리를 한 손으로 열심히 주물러 보았다. 혹시나 녹아서 다시 흐를까 기대하면서. 어린 여배우에게는 잔인하게도 무대 위에 핏방울은 단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선혈이 낭자하는 살해 장면을 연출하고 싶던 내게는 흐르던 피도 시간이 지나면 굳는다는 기본적인 상식도 없어 벌어진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다.


짐승을 잡아서 받아낸 피인 선지가 그야말로 우리가 먹는 '선짓국'의 굳은 선지가 되어


진짜 피를 사용하는 대신 붉은 물감인 가짜 피를 썼다면, 더 진짜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었을 텐데. 만약 가짜 피를 썼다면 내가 원하던 대로 선혈이 낭자한 무대를 연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날의 해프닝 덕분에 나는 미래의 작가로서 절대 잊지 않아야 할 교훈을 배웠다. 관객이나 독자에게 진실을 전하기 위해, 오히려 '사실'이 방해가 되기도 한다. 진실을 향해 가는 표현의 과정에서 때로 '거짓'이 필요하다.


진실을 향해 가는 표현의 과정에서 때로 '거짓'이 필요



"작가는 궁극적인 진실을 찾아가는 사람이지만
그 길의 모든 단계에서 거짓말을 한다."
-앤 라모트


보통 에세이는 사실, 소설은 허구라고 믿는다. 하지만 100 퍼센트 사실인 에세이도, 100퍼센트 허구인 소설도 없다. 에세이든 소설이든 사실과 허구 사이의 스펙트럼 어딘가에 존재한다. 에세이를 쓰더라도 진실에 근접하기 위해서 허구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있다. 생생한 살해 현장을 보여 주기 위해 진짜 피 대신 가짜 피를 써야 하는 것처럼.


작가는 진실을 위해 거짓말을 한다


작가는 진실을 위해 가는 모든 과정에서 거짓말을 한다.




윤소희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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