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나는 나 자신의 내면을 이해해 보고 싶은 마음에 주저 없이 심리학 전공을 택했다. 운 좋게 임상심리학 교수님께 2년 동안 상담을 받으며 내면을 철저히 분석해 보고 밑바닥까지 들어가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심리 상담을 하면서 나의 최초의 트라우마가 무엇인지, 왜 어둠을 무서워하는지 알게 되었다.
퇴근하고 집으로 들어서는 아빠의 손에 파인애플이 들려 있었다. 다섯 살짜리 나와 그 보다 어린 동생들은 겅중겅중 뛰며 군침을 흘렸다. 달려드는 세 딸을 진정시키며 아빠 손에서 그 이국적인 과일을 받아 든 엄마가 내게 현관문을 잠그고 오라고 시켰다. 급하게 현관으로 달려갔다. 얼핏 보니, 문은 이미 잠겨 있다. 얼른 방으로 돌아가 엄마가 잘라주는 파인애플 조각을 날름 받아먹었다. 황홀한 열대과일의 맛이 입안에서 채 가시기 전, 달콤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엄마의 찢어지는 듯한 고함이 들렸다.
왜 현관문 안 잠그고 잠갔다고 거짓말했어?
춥고 깜깜한 골방에 갇힌 나는 목이 터져라 울었다. 얼마나 있다 풀려났는지, 엄마가 나를 마침내 용서해 주었는지, 골방으로 기억되는 그 공간이 정확히 어떤 곳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캄캄한 어둠과 공포, 그리고 억울함만 남아 있을 뿐.
'진실'은 어릴 적 우리 집 가훈 중 하나였다. 거짓말하면 안 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자랐다. 그런데 진실이란 과연 뭘까? 사전적 정의로는 진실은 거짓이 없는 사실이다. 그럼 정말 거짓말만 하지 않으면 진실한 걸까?
진실이 최고의 가치였던 집안의 부모로서 엄마는 거짓말한 딸을 따끔하게 혼내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가르치고 싶었을 것이다. 현관문이 잠기지 않았는데, 잠갔다고 말한 건 분명 거짓말이니까.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스스로 진신을 밝혀 억울함을 벗어나기에는 너무 어렸고, 엄마는 어린 세 딸을 씻기고 재우면서 그 속에 담긴 진실을 들여다볼 만한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진실이란 대체로 그 어떤 거짓도 덧붙이지 않은 사실 그대로를 말한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와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된 배경, 의도 등 많은 것들을 담고 있는 진실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좀 더 예리한 시각과 깊은 사유로 단련된 철학,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이 담긴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다.
상담을 통해 내 상처의 근원을 알게 된 이후, 나는 누군가 내게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될 때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그의 말을 믿어주려고 한다. 특히 그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설사 그 말이 거짓이었음이 드러난다 해도 칼을 들이대 정확한 사실을 발라내는 것보다 신뢰가 먼저라고 생각한다. 거짓말을 했는데도 내가 상대를 믿어준다면, 오히려 진실이 승리할 수도 있다.
20대 초반, 누군가 내 비행을 부모님께 밀고한 일이 있었다. 엄마가 펄펄 뛰며 야단을 칠 때, 아빠가 '우리 딸이 아니라면 아닌 거다. 아빠는 우리 딸을 더 믿는다'라며 내 말을 믿어주셨다. 살면서 사소한 거짓말 한두 번도 안 하고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거짓말을 몇 번 했느냐, 그 자체는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다. 나는 그 경험을 통해 평생 '어떤 일이 있어도 내 인생의 가치를 훼손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그 가치가 북극성처럼 삶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다. 결국 사소한 사실의 실체를 밝히는 것보다 사랑으로 믿어준 진실이 승리한 것이다.
누군가를 그렇게 믿어주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엄청난 사랑의 힘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과 자긍심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가치를 믿고 굳건하게 서 있지 못하면, 흔들흔들, 휘청휘청, 거짓말할 수밖에 없는 상대를 믿어줄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
참된 진리는
내용 없는 공허한 솔직함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분명한 목적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는
어떤 사람을 얽매고 있는 사슬을 풀어
그를 자유롭게 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참된 진리는
지금까지 거짓에 속아
자유 없이 두려워하며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눈을 열어 주고
자유를 돌려주는 것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진실> 중
진실을 읽어내기 위해 사랑과 굳건한 자존감이 필요하듯,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는 생명에 대한 의지와 믿음, 그리고 용기가 필요하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가감 없이 얘기하는 것이라면 컴퓨터나 로봇 같은 기계들도 할 수 있지만, 진실을 얘기하는 건 살아 있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진실은 공허한 솔직함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진실은 말하는 나와 듣는 상대방 모두를 얽어매는 모든 속박에서 자유케 하고 생명을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진실하기 위해서는 어떤 사실을 말할 때 누구에게 말하는지,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고, 그에 맞춰 적절한 모습을 갖춰야 한다. 이 말로 상대방의 족쇄를 풀어줄 수 있는지 아니면 더 옭아매게 되는지, 이 말로 상대를 살릴 수 있는지 아니면 죽이게 될지...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
진실을 말해도 상대가 오히려 그걸 이용할 수도 있다. 불합리한 제도하에서는 진실이 반드시 승리한다는 보장도 없다. 내가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내게 엄청난 불이익을 줄 수 있었기에 많은 지인들이 만류한 일이 있었다. 그때까지 쌓아온 모든 걸 한꺼번에 잃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용기를 갖고 사실대로 말했을 때, 노예 해방이라도 된 듯 마음이 가볍고 기뻤다. 그 무엇도 나를 진정으로 구속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진실을 말하는 대가로 내가 불이익을 당하게 될 때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특히 내 잘못이나 죄를 인정해야 할 때는 당당하게 고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사 그 대가가 내가 저지른 잘못에 비해 말도 안 되게 억울하다 해도 그걸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남의 죄를 드러내야 할 때는 그의 자유와 생명을 먼저 걱정하고 고민해야 하지만, 내 죄를 드러내야 할 때는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나 자신뿐이라면 진실을 드러내는 쪽이 옳다고 믿는다. 어둠 가운데 머물면 아주 사소한 죄도 나를 파괴할 수 있을 만큼 큰 파워를 갖는다. 반대로 아무리 추악한 죄라도 일단 고백하고 빛 가운데 던지면, 그것이 나를 묶어놓을 수 있는 힘을 잃게 된다. 찬란한 빛 가운데에서는 그림자마저 빛날 수 있다.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지만, 그것을 숨기는 데 따르는 고통에 비하면 별 것 아닐 수 있다.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에서 남편이 아닌 딤즈데일 목사의 딸을 낳은 헤스더는 간통이란 죄에 대한 대가로 평생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고 살았다. 상대를 밝히지 않고 혼자 벌을 받던 헤스더는 자유함 가운데 살아갈 수 있었지만, 죄를 숨기고 살아야 했던 딤즈데일 목사는 매일매일 고통 속에서 영혼이 조금씩 파괴되었다. 결국 견딜 수 없게 된 딤즈데일이 마침내 사람들 앞에서 모든 죄를 공개하고 회개한다. 복수를 위해 딤즈데일 곁에서 지켜보던 헤스더의 전남편 칠링워드는 딤즈데일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자 넋을 잃은 사람처럼 이렇게 탄식한다.
기어이 내게서 도망쳐 버렸군. 새가 올무에서 빠져나가는 것처럼 도망쳐 버렸군
딤즈데일이 자기 죄를 고백한 순간 그의 죄도 칠링워드의 복수심도 더 이상 딤즈데일을 옭아맬 수 없게 된 것이다. 빛 가운데 거하면 어떤 죄를 지었다 해도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상처나 트라우마도 그것을 감춰두고 혼자 해결하려고 하면 절대로 치유될 수 없다. 상처 입은 사람들은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선입견에 선의의 의도조차 밀어내기 쉽다. 상대가 결국 자기를 떠나갈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의심과 경계의 벽을 허물지 못하고 철저하게 고립된다. 사람은 절대 혼자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수 없다. 모든 것에 무감각해지는 감정의 마비로 일시적인 안정감을 얻을 수 있지만 결국 상처의 영향력을 더 길게 지속시킬 뿐이다. 상처는 드러내어 치료를 받아야 나을 수 있다.
섣부른 충고와 조언으로 상처를 더 헤집고 덧나게 하는 사람들도 많으니, 정말 나를 이해하고 내 아픔을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잘 찾는 게 중요하다. 물론 상처를 드러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부정적 사고가 긍정적 믿음으로 바뀌고 새 삶을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정서적 고통을 이해받고 나눌 수 있는 가까운 사람들과 서로 보듬는 치유의 관계가 계속된다면 상처는 천천히 치유된다. 만약 상대방이 자신의 아픔을 함께 드러내 준다면 신뢰 관계가 좀 더 빠르고 견고할 것이다.
폭행이나 성폭행 같은 엄청난 피해든, 불의의 사고든, 본인의 실수나 잘못이든, 상처가 만들어진 계기가 무엇이든 간에 되돌릴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는 과정은 필수다. 직면하고 충분히 슬퍼하고 아파하는 과정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상처를 직면하는 과정에서 내 상처를 드러내어 보여 줄 수 있고, 이해와 공감을 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한데, 그 상대가 꼭 가족이나 친구일 필요는 없다. 비슷한 상처를 경험한 사람이나 전문 상담가나 심리치료사가 그 역학을 할 수도 있다. 상대가 누구냐보다 중요한 건 상대가 얼마나 내 상처를 공감해 줄 수 있느냐다.
사랑 앞에서는 투명해지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 앞에서 나의 진실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이 되지 못한다면, 그거야 말로 불행한 일이 아닐까. 사랑하는 이 앞에서 자꾸 뭔가를 숨기게 된다면, 안타깝지만 그건 사랑이 아닐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도 진실한 나 자신이 될 수 없다면, 어느 순간 스스로를 부인하고 자꾸 위장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나면, 진짜 내 모습이 뭔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자기 자신에게 속을 수 있다. 사랑 앞에서 투명해지지 못하는 건 진정한 나 자신을 잃는 지름길이다.
배우자에게 상처가 될 이야기는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게 지혜라고 많이 이야기하는데, 그 말이 무조건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평생 함께 할 배우자라면 서로의 상처를 드러내 보일 수도, 그 상처를 보듬어 줄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가치를 긍정할 수 있는, 바로 선 두 사람이 만나야만 그런 신뢰 관계가 형성된다. 상대방이 나를 속이고 있다는 작은 의심에 같이 한번 한 거짓말이 또 다른 거짓말을 불러오고, 결국 소중했던 사랑에 금이 가버리고, 한번 금이 간 관계는 회복이 어렵다. 얼마나 많은 부부와 연인이 진실을 드러내지 못하고 알아봐 주지 못해 금이 가고 깨지는지...
가짜 웃음은 얼굴에 주름을 남기지 않는다. 진실은 매끄럽고 고운 피부가 아니라, 얼굴의 주름이나 흉터 같은 게 아닐까. 감정에 충실했기에 만들어진 쪼글쪼글한 주름과 누군가를 전심으로 믿어줘서 생긴 상처를 여유 있게 보일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늙어가고 싶다. 가짜 웃음으로 팽팽한 얼굴을 갖기보다는 주름진 얼굴로 활짝 웃을 수 있기를 원한다. 얼굴에 한 줄 한 줄 고운 주름이 늘어나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고 싶다.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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