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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Jul 08. 2024

나를 보호하는 성벽이 오히려 나를 가두는 건 아닐까

고독

어린아이 때부터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 일기장을 덮어 보이지 않는 곳에 잘 숨기고, 아무도 찾지 않는 다락방이나 창고 같은 곳을 찾아 들어갔다. 아무도 침범하지 않는 고독의 공간에서 오히려 하늘을 나는 것처럼 상쾌함을 느꼈다. 넓은 세상, 바글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피로감을 느꼈다. 너무 일찍 고독을 알아버렸다. 세상 밖에서는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줄 테지만, 튼튼하게 쌓아 올린 성벽 안으로는 그 누구도 들이지 않으리라.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세상 밖에서는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줄 테지만, 튼튼하게 쌓아 올린 성벽 안으로는 그 누구도 들이지 않으리라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성벽 안으로 가끔 누군가를 들이기도 했다. 혼자 세운 두 무릎을 끌어안고 외로움에 몹시 지쳤을 때, 혹시 저 사람은 나를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굳게 닫힌 성벽 문을 슬쩍 열었다. 친절하게 손을 잡고 여기가 문이에요, 여기가 창이에요, 이게 나예요, 바로 이게 나라고요, 외쳤지만, 모두 눈뜬장님처럼 더듬거리다 돌아갔다. 청동 탑에 갇힌 다나에를 만나기 위해 황금비로 변신한 제우스라면 또 모를까. 성안으로 들어가 그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원래 문도 창문도 없는 성벽일 뿐인데, 내가 문을 열었다고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


사람에게 기대려다 멍만 들었다


사람에게 기대려다 멍만 들었다. 더없이 고독하고 외로워졌다. 사랑과 고독을 종이의 양면으로 표현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도 늘 고독할 수밖에 없는 진실을 너무 일찍 알았다. 언젠가는 나의 외로움이 봄볕에 눈 녹듯 싹 사라질 거라는 말을 듣고 싶었지만, 반백년쯤 살아보니 인생은 본래 외로운 것이었다. 목숨처럼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어도, 아무리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고독은 영원한 연인처럼 언제나 나와 함께 있다.


아무리 목숨처럼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어도, 아무리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고독은 영원한 연인처럼 언제나 나와 함께 있을 것


외로움 때문에 몸을 떠는 것보다 더 불행한 것은 외로움을 느껴 볼 시간도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외로워할 틈이 있는지, 먼저 돌아보라.

안도현 <먼저 돌아보라> 중


외로움을 그저 참고 견뎌야 하는 고문처럼 여긴다면 외로움의 시간은 고통이 된다. 하지만 외로움의 시간을 자신을 알아가는 시간, 자신을 껴안고 친해지는 시간으로 삼는다면 고통스럽지만은 않다. 어쩌면 설렘과 행복을 안겨 줄 수도 있다.


외로움의 시간을 자신을 알아가는 시간, 자신을 껴안고 친해지는 시간으로 삼는다면 고통스럽지만은 않다


산 위에 조금만 있어 보면 외롭다는 생각은 사라진다. 발가벗고 살기 때문에. 발가벗은 사람은 또 다른 차원의 동반자가 함께 있음을 알게 된다. 영혼은 그 윗도리를 벗기 시작하고 이윽고 알몸이 되면서, 혼자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존 버거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모음> 중


외로울 때, 사람에게 기대거나 사람을 통해 고독을 해결하려면 실망과 상처만 남는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가 단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라면 위험하다. 오히려 외로울 때는 사람 대신 자연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내 영혼과 알몸과 대면하는 게 먼저다.


외로울 때는 사람 대신 자연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내 영혼과 알몸과 대면하는 게 먼저


인간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한 남을 사랑할 수 없다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자신을 먼저 알고 사랑하지 못한다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이해받기를 기대하기 전에 스스로를 이해해야 한다. 지금 고독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그저 묵묵히 견디기만 할 게 아니라 나의 벗은 몸과 마음을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눈으로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발가벗은 나 자신과 마주할 때 그동안에는 알지 못했던 나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시절은 서정적 시기.
한 개인이 거의 전적으로 자기 자신한테 집중하고 있어서 주변 세계를 보지도, 이해하지도, 명료하게 판단하지도 못하는 시기. 
미성숙에서 성숙으로의 이행은 서정적 태도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밀란 쿤데라 <커튼> 중



부끄럽게도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서정적 시기가 너무 길었다. 내가 누구인지 깨닫지 못한 채, 누군가 나를 온전히 이해해 줄 거라는 기대에 그 누군가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헤매고 다녔다. 찾았다고 착각하며 문을 열고 사람을 들였다가 낯선 타인에 아뜩해지는 일을 반복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사람을 통해 외로움을 해결하려는 시행착오 속에서 실망과 회의를 느끼고, 바닥까지 절망하기도 했다. 나 자신이 싫어 죽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도 했었다.



어느 날, 문득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언제나 존재했지만 그 존재조차 깨닫지 못했던 이들을 보게 되었다. 나 자신만 들여다보며 외로움 타령을 하고 있던 내가 밖에서 떨고 있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기 시작한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 너무 멀어 아직 가보지 못한 나라에 열 살도 되기 전에 이웃과 친척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에이즈에 걸려 치료가 필요한 아이가 있었다. 누군가 손을 내밀어 주지 않으면 마실 물도 먹을 것도 없어 죽어 가는 아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저 사진일 뿐이었지만 그 사진을 보며 더 이상 외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서나마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 큰 힘을 주었다.


밖에서 떨고 있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기 시작한 그 순간은 분명 기적 같은 순간


사랑하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 몸부림치며 사랑 타령을 해왔지만, 정작 나는 사랑을 하지 못했고 사랑하기를 거부하며 살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저 시선을 돌려 손 한번 내밀면 되는 거였는데, 그토록 오랜 시간 보지 못하고 혼자 외쳐대고만 있었다. 제발 나를 좀 바라봐 달라고. 발가벗은 자아와 대면하고 자기를 알아가는 고독의 시간은 분명 값진 시간이지만, 너무 오래 자기 안에 매몰되는 건 삶을 비루하고 부끄럽게 만든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자. 누군가의 삶에 빛을 비추는 일은 결국 내 삶에도 빛을 비추어 준다. 


내가 먼저 다가가서 그에게 손을 내밀자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강연 신청 및 상위 1% 독서 커뮤니티 무료입장, 1:1 글쓰기 코칭 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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