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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밀을 만들기 싫다!_아끼던 일기장을 태우는 마음

알바 데 세스페데스 <금지된 일기장>

by 윤소희

마흔셋의 주인공 발레리아는 어느 날 문득 일기장을 사서 감추기 시작한다. ‘일기장’은 그녀가 유일하게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 진실한 언어를 허락받는 유일한 장소가 된다. 가족에게 들키지 않으려 보관 장소를 옮기고 또 옮기며, 그녀는 조용한 저항처럼 그 안에서 숨을 쉰다. 알바 데 세스페데스의 <금지된 일기장>은 그 나이 즈음의 나를 떠올리게 했다. 나 또한 어느 시절, 아주 비슷한 마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IMG_0928.jpeg 나 또한 어느 시절, 아주 비슷한 마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비밀을 만들기 싫다. 게다가 우리 집은 너무 비좁아서 비밀을 만들래야 만들 수조차 없다.

알바 데 세스페데스 <금지된 일기장> 중


일기장을 산 날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늦가을이었는데 하늘은 푸르렀고, 봄날처럼 햇살이 따스했다. 그날 나는 혼자였는데 그토록 화창한 날에 혼자이면 안 될 것 같아 일기장을 팔에 끼고 집에 돌아왔다. 귀도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 일기장을 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일기장을 사지 않았다면 아예 귀도에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는 나 자신에게도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알바 데 세스페데스 <금지된 일기장> 중



소설 속 발레리아의 일기장이 지금의 발레리아들에겐 ‘휴대폰’일 것이다. 영화 <완벽한 타인>이 보여주듯, 현대인의 가장 사적인 공간. 나 역시 며칠씩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일기장을 감춰두기만 했던 때가 있었다. 누군가 내 휴대폰을 열어보자고 할까봐 이유 없는 불안을 느끼던 날들도.


WechatIMG8482.jpg 휴대폰만 열면 모두의 비밀이 드러난다


미켈레(남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내 내면에 관심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 내가 밀어내야 할 귀도뿐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다.


문정희 시인의 ‘남편’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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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 데 세스페데스 <금지된 일기장>

어쩌면 이 소설에서 가장 안타까운 장면은, 발레리아가 결국 그 일기장을 태우고 아무 일 없던 시절로 되돌아가는 모습이다. 그러나 나 역시 발레리아처럼, 결국 나의 비밀을—나의 생기를—불태웠다. 그렇게 모든 흔적을 지우고 나니, 어느새 누구에게 휴대폰이나 노트북을 건네도 두근거릴 일 없는 투명한 삶이 되었다.



나를 다시 살게 했던 일기장을, 끝내 자기 손으로 불태울 수밖에 없는 마음.

70여 년 전의 이탈리아나 지금 여기나, 그 본질은 여전히 크게 다르지 않다.



비밀은 삶을 어지럽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살아 있게도 한다. 그럼에도 살아 있다고 느끼는, 그 단 하나의 공간의 문을 다시 여는 일은 없을 것이다.


IMG_0894.jpeg 알바 데 세스페데스 <금지된 일기장>




* 윤소희 작가와의 비밀 모임에 초대합니다.

모임 장소 (서울 강북 모처)는 신청이 완료되신 분들께만 보내 드려요.


신청: https://forms.gle/MUPGJNzPhiviRSEf8


WechatIMG8483.jpg 꽃 뒤의 숨은 얼굴 보러 오세요 ^^

WechatIMG8148.jpg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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