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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밀리 밴드 합주, 악보부터 찢으라고?

정답이 있다고 믿는 마음

by 윤소희

다섯 달 만에 패밀리 밴드 합주를 했다.


WechatIMG36009.jpg 패밀리 밴드 YESS


지난번엔 아이들이 잘 모르는 무한궤도의 음악을 부모 뜻대로 연주했으니, 이번엔 아이들에게 선곡의 기회를 주었다. 물론 자유를 주었다고 진정한 자유가 생기는 건 아니다. 엄마 아빠의 실력을 고려할 때, 아이들이 진짜 좋아하는 곡들은 연주가 불가능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사실을 잘 아는 아이들은 열없이 노래 한 곡을 골랐다. The Cranberries - Zombie.


비교적 난이도가 낮은 곡을 골라주었지만, 그마저도 보컬인 남편이 브레이크를 걸었다. 여성 보컬의 오리지널 대신, 남성 보컬에 맞게 편곡된 곡으로 대신하자는 것이었다. 기타와 베이스기타를 맡은 아이들은 쉽게 조 옮김이 가능하니, 좋다고 했다. 드럼은 조가 바뀌거나 음을 몇 도 올리거나 내린다고 해서 바뀔 리 없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침내 기다리던 합주 시간. 나는 평소보다 더 신경 써서 드럼 악보를 만들었다. 연주 도중에 넘길 수 없으니 악보를 요리조리 잘라 붙여 한 페이지를 만드는 정성까지 보였다. 합주를 시작하기 전에는, 나의 이토록 정교한 준비가 걸림돌이 될 줄은 몰랐다.


합주가 시작되자마자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엄마, 그렇게 연주하면 안 돼.

나는 다른 세 사람의 연주와 관계없이, 오리지널 곡의 악보대로만 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막내 아이가 벌떡 일어나 달려와 내 악보를 집어 없애려고 했다.

이 악보가 엄마의 연주를 방해하고 있잖아.

나는 캄캄해졌다. 음악을 들으며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악보를 보며 박자와 마디수를 세는 데 급급했던 나. 노래가 조금만 편곡되어도 어떻게 연주해야 할지 막막했다.


WechatIMG9536.jpg 악보를 요리조리 잘라 붙여 한 페이지를 만드는 정성까지 보였다


드럼을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는 큰아이가 이런 식으로 하라며 보여주는데, 많은 스트로크를 하지 않고 다양한 스킬을 넣지 않았다 뿐이지, 아이의 연주는 음악의 감정에 정확하게 일치했다. 충격이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음악을 들으며 거기에 어울리는 감정을 손발로 연주해야 하는데, 나는 악보라는 틀에 얽매여 음악 자체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단순히 재능의 문제일까. 타고난 음악성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정답이 있다고 믿는 내 마음 때문일까.


나는 글을 쓸 때도, 언제나 정답을 가정했던 것 같다. 문장을 쓰고, 글의 구조를 짤 때마다 하면 안 되는 일들의 리스트가 길었다. 그 틀이 나를 지켜주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 틀 때문에 나는 아직, 음악도 글도 진짜로 ‘듣고’ ‘쓰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패밀리 밴드 YESS cover 'Zombie'


망설임 가득한 어정쩡한 연주로 합주는 끝났지만, 내겐 묘하게 오래 남는 합주였다. 다음에는 기타를 부수거나 태우는 퍼포먼스 대신, 악보를 찢는 걸로 연주를 시작해 볼까.





WechatIMG9450.jpg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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