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며 외로움이며를 말하지 않는
마흔 살의 동화
-이기철
먹고 사는 일 걱정되지 않으면
나는 부는 바람 따라 길 떠나겠네
가다가 찔레꽃 향기라도 스며오면
들판이든지 진흙땅이든지
그 자리에 서까래 없는 띠집을 짓겠네
거기에서 어쩌다 아지랑이 같은 여자 만나면
그 여자와 푸성귀같은 사랑 나누겠네
푸성귀같은 사랑 익어서
보름이고 한 달이고 같이 잠들면
나는 햇볕 아래 풀씨같은 아이 하나 얻겠네
먹고 사는 일 걱정되지 않으면
나는 내 가진 부질없는 이름, 부질없는 조바심
흔들리는 의자, 아파트 문과 복도마다 사용되는
다섯 개의 열쇠를 버리겠네
발은 수채물에 담겨도 머리는 하늘을 향해
노래하겠네
슬픔이며 외로움이며를 말하지 않는
놀 아래 울음 남기고 죽은 노루는 아름답네
숫노루 만나면 등성이서라도 새끼 배고
젖은 아랫도리 말리지 않고도
푸른 잎 속에 스스로 뼈를 묻는
산노루가 되어 나는 살겠네
몇 년 전 아이와 함께 사이언스 뮤지엄에 갔을 때의 일이다.
아이가 버튼을 누를 때마다 일정 숫자까지 불빛이 켜졌다.
25, 35, …45…
19세기에만 태어났어도 난 이미 죽은 목숨이고,
20세기라 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먹고 사는 일 걱정되지 않으면”
아니 먹고사는 일이 조금은 걱정된다 해도
이제는
“슬픔이며 외로움이며를 말하지 않는
놀 아래 울음 남기고 죽은 노루”이고 싶다.
‘슬픔’이니 ‘외로움’ 이니를 말하느라 얼굴을 찌푸리며 낭비하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많다.
부질없는 것들은 모두 버리고
흐르듯 자연스럽게.
평온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