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지대> - 줌파 라히리
한 아이는 아기 때 엄지 손가락을, 다른 아이는 집게손가락을 빨고,
한 아이는 사과 주스를, 다른 아이는 포도 주스를 좋아하고,
한 아이는 책 읽는 걸 좋아하고, 다른 아이는 글자라면 질색을 하고,
한 아이는 운동신경이 별로 좋지 않은 데도 겁 없이 몸을 과격하게 움직이고, 다른 아이는 날렵한데도 늘 조심에 조심을 더하고,
한 아이는 무엇을 하든 잘할 때까지 무한 반복하는 걸 즐기고, 다른 아이는 잠깐 집중하려면 벌써 지겨워지고
…
겨우 13개월 차이인 두 아들은 차이점을 열거하려면 밤을 새도 모자랄 만큼
달랐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둘을 구별하지 못하고 헷갈렸다.
이런 두 아들을 둔 엄마이기에 우다얀과 수바시 형제의 이야기가 좀 더 특별하게 읽혔는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붙어 있는 형제는 자주 싸우긴 해도, 서로가 없이는 잠시도 견디지 못할 만큼 관계가 깊고 끈끈해, 엄마로서는 괴상한 상상을 하며 걱정해 보기도 했다.
늘 하나처럼 다니던 형제가 혹시 같은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어쩌나?
차라리 형제가 한 여자를 사랑해 티격태격하는 삼각관계 이야기라면 가슴이 이리 무겁지는 않았을까.
살해당한 ‘동생을 대신’해 동생의 아내와 결혼을 하고, ‘동생의 아이를 키우고’ ‘동생의 자리를 대신한다’는 ‘어느 면에서는 그릇된 일로 여겨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운명적인 일로 생각’된 일을 행하는 형 수바시.
‘아내에서 과부로, 제수에서 아내로, 엄마에서 자식 없는 여자로 바뀌어’ 간 가우리.
적은 분량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권짜리 장편 소설일 뿐인데 읽고 난 후 마치 대하소설을 읽은 듯했다.
저지대에 고여 있는 물처럼 내 몸속의 피도 한동안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듯, 장기에 물이 차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나는 나, 그냥 나이면 좋은데
좋든 싫든 내 정체성을 규정하는 관계들.
멀리 유학을 떠나기도 하고, 외국에 정착해 살기도 하고 (수바시)
심지어 자식마저 버리고 떠나기도 하고 (가우리),
철저히 외면해 버리고 살아가기도 하지만 (벨라)
또 그 모든 관계들을 다 발라내고 나면 오롯이 남게 될 ‘나’라는 건 또 뭘까.
‘어떤 생물은 건기를 견뎌낼 수 있는 알을 날’기도 하고, ‘또 어떤 생물은 진흙땅에 몸을 묻고 죽은 체 지내면서 우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도 하고.
저마다의 방법으로 그렇게 살아갈 뿐.
수바시는 우다얀을 따라간 자신에게 화가 났다. 아직도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게 화가 났다.
자신의 내부에서 늘 피어오르는 두려움에 넌더리가 났다. 자신이 존재감 없이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자신이 우다얀의 뜻을 거스른다면 둘은 형제가 아닌 관계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늘 따라다녔다.
시간은 물리적 세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마음의 이해력 안에 존재하는가? 시간은 오직 인간만이 인식하는가? 어떤 짧은 순간이 몇 시간이나 되는 것처럼 부풀려지고, 1년에 해당하는 긴 시간이 단 며칠로 줄어드는 건 무엇 때문일까? 짝을 잃거나 먹잇감을 죽일 때 동물도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는가?
그녀가 손에 쥐고 힘껏 으깼던 시간은 아무런 실체도 남기지 않았고, 다만 피부에 보호막 같은 시간의 잔해만 남겼다.
그녀는 엄마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있다. 벨라의 삶의 모든 게 엄마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나는 나다, 벨라는 중얼거리곤 한다. 나는 내 방식으로 산다. 엄마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