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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Apr 15. 2020

창문이 사라진 창

잘 닦인 투명한 창을 가질 때까지


잠에서 깨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작은 창문을 여는 일이고, 잠들기 직전 마지막으로 하는 일이 창문을 닫는 일이다. 자가 격리, 사회적 거리두기 등의 이유로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대신, 밖을 바라볼 수 있는 곳 그리고 바깥의 바람을 잠시 들일 수 있는 곳, 창.


내게 주어진 창문은 손바닥처럼 작고, 그마저도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빌딩들 때문에 블라인드를 꼼꼼히 내려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그 작은 창은 나의 숨구멍 노릇을 해준다. 몹시 답답해지면 창문 앞에 잠시 쭈그리고 앉아 코를 가만히 대어 본다. 코끝을 스치듯 슬며시 지나가버리는 바람의 냄새를 맡아본다. 그리운 냄새.


문득 지겹도록 정확히 반복되던 일상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모든 일상이 멈추기 전까지 일주일에 세 번씩 꼬박꼬박 필라테스 수업을 받았다. 허리 디스크로 오래 앓은 후라 다른 일은 빠뜨려도 꼭 지키던 일이다. 몇 달 전, 그날도 아무 생각 없이 트레이너의 구령에 맞춰 팔과 다리를 벌렸다 오므렸다 하며 평소에 잘 쓰지 않던 근육을 쓰고 있었다. 근육의 통증을 견디며 멀리 창밖으로 무심코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내가 아닌  다른 여자가 거울처럼 팔과 다리를 벌렸다 오므리며 나와 마주 서 있는 게 아닌가. 여자는 창밖에서 창에 매달리듯 서서 창문을 닦고 있었다. 창문을 어찌나 깨끗이 닦았는지 창문이 사라진 그 창은 허공처럼 텅 빈 듯 투명했다. 창문이 사라져 버리니, 열심히 팔을 벌렸다 오므렸다 하는 걸레질이 마치 춤사위 같다. 창 안의 나는 찡그린 표정으로 팔다리를 움직이는데, 창 밖의 여자는 날개처럼 사푼사푼 팔다리를 움직인다.


문득 잘 닦인 투명한 창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을비에 미세먼지가 깨끗이 씻긴 파란 하늘 같은 창, 설거지 후 끓는 물에 소독한 그릇처럼 만지면 금세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날 것 같은 창. 눈부신 햇살을 듬뿍 받을 수 있도록 잘 닦인 투명한 창을 갖고 싶었다. 찡그리며 버둥거리던 팔다리가 투명한 창을 통과하면 날개가 되어 사뿐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아서.


상상 속에서 펄럭이던 날개를 잠시 접고 보니, 먼지와 찌든 때로 얼룩진 작은 창문이 내 눈앞을 가로막고 있다. 날개는 잠시 접어두고 대신 걸레를 든다. 내게 주어진 작은 창을 정성 들여 닦는다. 맑은 가을 하늘 위를 춤추듯 걸레질을 하던 그녀의 날갯짓을 그리워하며 나는 나의 창을 닦는다. 잘 닦인 투명한 창을 가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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