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형이 뭐예요?"
“혈액형이 뭐예요?"
겨우 네 가지밖에 없는 혈액형으로 사람을 판단해 버린다면 당연히 오류가 많을 텐데, 그럼에도 혈액형으로 성격을 파악해 보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래서인지 혈액형을 묻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내가 먼저 상대의 혈액형을 묻고 상대가 어떨 거라 짐작하거나 판단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나중에 혈액형을 알고 나서 ‘어쩐지’하던 순간은 꽤 있었다.
이제 마흔도 훌쩍 넘어, 누군가가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을 일도 없고 새로운 연애사를 써갈 기력도 없지만, 혈액형이 떠오른 김에 결혼 전 연애사를 정리해 보고픈 마음이 들었다.
앗, 그런데 뭐 이리 간단한가.
나를 좋아했던 한 떼의 남자 무리: A형
내가 딱 한 번 짝사랑했던 남자: O형
내 남편: B형
이렇게 연애사를 정리해 놓고 보니, 혈액형이 전부인 듯 많은 것을 예언해 주는 요소로 보인다.
O형 남자는 특성을 검색해 보면 여자들에게 인기 좋고 바람기 많고, 여자의 외모를 많이 보고, 여자의 내숭을 좋아한다고 한다. 아, ‘내숭’. 바로 그거였구나. 가끔 내숭을 떨 줄 알았어야 했는데, 나는 모든 감정과 생각이 솔직히, 그것도 아주 금세 드러나는 B형 여자였던 것. 가슴 아프지만 O형 남자를 짝사랑으로 가슴에 묻었다.
그렇다고 연애사가 종결된 건 아니어서 그 뒤로도 이어지는데, 지금 돌아보면 A형 남자들과의 연애는 똑 부러지게 언제쯤 시작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주위에서 아주 은근히 맴돌며 내게 관심이 있다는 분위기를 슬쩍 풍기기만 하는 A형 남자. 결국 내 눈에 그것이 들어오고 내 관심을 끌면 그때부터 비로소 연애가 시작되는 것이다.
튀는 것을 싫어하고, 꼼꼼하고, 수줍음과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고 묘사되는 A형의 성격 때문인지, A형 남자들은 ‘좋아한다’ ‘사귀자’ 같은 표현을 잘하지 못했고, 내가 눈치채 주고 관심을 가져 주기를 바라며 그저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소심함을 보였다. 심지어 어떤 A형은 몇 년을 혼자 가슴앓이했기에, 나만 빼고 모든 사람이 아는 그 유명한 사랑의 감정을 겨우 군대 가기 두 달 전에야 내가 발견해 겨우 두 달을 만나다 헤어진 경우도 있었다.
아마 A형 남자들에게 늘 솔직하고 시원시원하게 일을 저지르는 내 성격이 자신들의 소심함과 반대되기에 매력적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나는 반대로 '아니 그것도 시원하게 말 못 해?’ ‘내가 해 줄게’ 하며 연애를 시작하지만, 결국 중요한 순간에 그들이 보이는 소심함에 질려 헤어지게 되고.
그러다 B형 남자를 만났다. 솔직하고 시원시원하고,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소심하게 오래 끌고 빙빙 돌리지 않고 첫 만남에서부터 관심을 바로 표현하고. 나는 ‘B형 남자’라는 영화도 있을 정도로 B형 남자가 무서운 줄도 모르고 B형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B형 남자를 낳아 B형 남자의 무서움을 알게 되었다.
B형 남자들에게 시달리다 보면, 가끔은 A형 남자들의 소심함이 그리워진다. 그 소심함이란 바로 내 마음에 조금이라도 상처를 줄까 배려하던, 그래서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던 사려 깊음이었을 테니까. 모든 깨달음은 '아주 조금 늦게' 찾아온다.
그럼에도 아마 다시 돌아가도 나는 착하고 소심한 A형 남자들 대신 자유로운 영혼인 B형 남자를 만나 결혼하지 않을까.
(뭐, 혈액형은 혈액형일 뿐. 그냥 이 새벽에 재미로 주절거려 보았습니다. A형 남자분들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