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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Jul 05. 2020

고단한 길, 우연히 마주하게 될 무언가를 기다리며

<아날로그를 그리다> - 유림

7년째 아이들과 함께 한 달 여행을 하면서 ‘뚜벅이’ 여행을 고집해 왔다. 운전을 좋아하지 않아서기도 하지만, 천천히 그리고 조금은 불편하게 다니고 싶어서다.  


기차에 올라 동행이 되어줄 책을 꺼냈다. 물론 종이책이다. 여행 중에는 많은 책을 들고 다닐 수 없기에 신중하게 동행을 골라야 한다. 기차가 슬슬 움직이기 시작하자 책장을 펼쳤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내 안에는 없는 기억을 더듬는 이 여행에 이만큼 맞춤한 동행은 없을 것 같다. 


"흑백사진은 인생과도 닮았다. 늘 노력한 만큼의 대가가 따라온다는 것, 우연한 순간으로 인해 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맞닥뜨리는 것, 그리고 문명의 이기에 기대어 잃어버리는 것 또한 그러하다."
-유림 <아날로그를 그리다> 중


평상시의 삶은 너무 빠르고 쉽게 흩어져, 잃는 줄도 모르고 잃어버리는 것이 많다. 1년 중 겨우 한 달이지만, 그 잃어버리는 것들을 우연한 순간에 기대어 붙들어 보고 싶었다. 설사 붙들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알아채고 싶었다.  


지난 여행에서 겨우 우유나 빵 같은 기본적인 식량을 사기 위해 한 시간씩 걸어 나가 무거운 백팩을 짊어지고 돌아올 때, 먹고사는 일의 고단함과 함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처럼. 삶이 내 앞에 어떤 상을 차려놓든 기쁨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는 태도를 함께 걷던 아이들을 통해 배웠던 것처럼. 


다음 목적지는 차가 있다면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시내버스를 타고, 시외버스를 타고 (또는 기차를 한 번 갈아타고), 시내버스를 타고 그리고 마침내 걸어서 간다면 두세 배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장마철이라 비 소식도 있다. 하지만 그 고단한 길 위에서 우연히 마주하게 될 무언가가 몹시 기다려진다.  


<아날로그를 그리다> - 유림


인화지 위로 흐릿한 상이 서서히 떠오르듯 나도 선명해지는 순간이었다.


어떤 이의 기억은 찌든 얼룩처럼 지우려 할수록 자꾸만 번져버린다. 어떤 이의 기억은 숨처럼 평생을 함께 드나든다. 누군가를 떠나며 남긴 나의 기억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잦은 다툼으로 쌓아 올린 침묵의 벽을 넘지 못한 채 난 스무 살이 되었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집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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