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소희 Aug 12. 2020

그냥 비가 아닌 이슬비, 실비, 가루비, 는개가

아름다운 우리말

한 달간 웨일스를 여행한 적이 있다. 여행했다기보다 한 달 동안 그곳에 살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일주일에 한 번씩 거처를 옮기기는 했지만, 머무는 동안은 그곳 사람들 집에서 그곳 사람들처럼 살았으니까. 


차가 없어 우유와 빵 같은 식량을 사기 위해 꽤 많이 걸어야 했다. 하버포드웨스트라는 웨일스 남서쪽에 있는 작은 도시에 머물 때였다. 작은 가게에 가기 위해서도 2,3 킬로미터쯤은 걸어야 했는데, 그 정도쯤은 걷다 보니 문제도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주일에 예배에 가려니 교회까지는 도무지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웨일스 여행 시 우리는 매일 걸었다


마침 웨일스에 살고 있는 한 블로거의 소개로 노부부를 소개받았다. 그 부부가 흔쾌히 차를 몰고 데리러 와줘 함께 교회에 가게 되었다. 젊었을 때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다는 제프(Jeff)와 수(Sue)는 차 안에서 또박또박한 영어로 천천히 말을 걸어왔다. 중학교 영어 시간에 배운 정도의 영어면 충분히 나눌 만한 대화들이 즐겁게 이어졌다. 


문득 수가 창밖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처럼 내리는 비를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 

“drizzle, drizzle이라고 해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입속으로 조그맣게 “drizzle" “drizzle”하고 발음하며, 그 단어를 아름다운 그곳의 풍광과 함께 기억 속에 담았다. 


비를 표현하는 아름다운 단어가 어찌 영어에만 있겠는가. 집으로 돌아온 나는 사전을 뒤적였다. 몰라서 쓰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말에도 섬세하고 아름다운 단어들이 많았다.  


안개처럼 가늘게 내리는 안개비 

안개보다는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는개

는개보다는 굵고 가랑비보다는 가는 이슬비

이슬비보다 더 굵게 내리는 가랑비

실같이 내리는 실비 

가루처럼 뿌옇게 내리는 가루비 

노드리듯 오는 날비 

채찍처럼 굵게 좍좍 쏟아지는 채찍비 

굵직하고 거세게 퍼붓는 작달비 

빗방울의 발이 보이도록 굵게 내리는 발비 

물을 퍼붓듯 세차게 내리는 억수 

좍좍 내리다가 금세 그치는 웃비 

한쪽으로 해가 나면서 내리는 해비

햇볕이 난 날 잠깐 뿌리는 여우비 

겨우 먼지나 날리지 않을 정도로 오는 먼지잼이 

꽃잎이 비처럼 쏟아지는 꽃비 


보슬보슬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drizzling’하고 가르쳐 주던 친절한 수처럼, 그냥 ‘비 온다’ 하는 대신 ‘안개비가 온다’ ‘는개가 온다’ 하고 말하는 사람이고 싶다. 


웨일스에서 매일 걸으며 만난 풍광_웨일스는 사람보다 양이 많은 곳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밤중에 듣는 블루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