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소희 Aug 11. 2020

한밤중에 듣는 블루스

아픔을 아픔으로만 노래하지 않는

불빛들이 하나둘씩 꺼져 가는 까만 밤. 더 이상 핑계 댈 수 없는 어둠과 고요가 찾아왔지만, 아무것도 쓰지 못한다. 쓰지 못하는 건 빛이나 소리 때문이 아니니까. 


열없어진 나는 대신 음악을 튼다. 블루스 선율이 흘러나온다. 블루스를 처음 들었던 게 언제였던가. 미련 없이 모든 걸 버리고 떠났을 때였다. 티셔츠와 청바지, 운동화 등 꼭 캐리어 하나 분량의 물건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소유도 없던 시절. 참 많은 것들을 미련 없이 버렸음에도 몇 달 동안 글을 쓴 노트 수십 권만은 끝내 버리지 못하고 캐리어에 집어넣었던 게 기억난다. 그 노트들은 지구를 몇 바퀴 돌아 여전히 책장에 꽂혀 있다. 버리고 버린 뒤 마지막으로 추려져 소유했던 다른 물건들은 이미 다시 버려졌는데도. 


세기말, 꼭 한 세기 전에 흑인들에 의해 탄생했다는 블루스를 미국 남단의 한 곳에서 듣는다는 건, 분명 다시 해볼 수 없는 귀한 경험이었다. 그것도 트레일러 홈에서 낡은 전축에 LP 판을 올려놓고라면. 로이 부캐넌(Roy Buchanan),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B.B. King,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스티비 레이 본(Stevie Ray Vaughan), 버디 가이(Buddy Guy) 등을 그때 처음 만났다. 각 뮤지션들의 기량을 평가할 지식이 없던 나는 그저 그 음악들을 온몸으로 들었다. 뮤지션마다 노래마다의 사연을 그 작은 트레일러 안에서 듣는 순간,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말로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으면서. 블루스가 온몸을 적셔오면 그냥 그렇게 젖어들었다. 

그 시절엔 사진을 남기지 않았기에, 비슷한 이미지로 대신한다.

이제는 10년도 훨씬 더 지난 시간, 미국 남단이 아닌 고국에서 낡은 LP 판 대신 맥북의 아이튠으로 블루스를 듣는데 갑자기 막혀 있던 눈물이 쏟아졌다. 슬퍼서 우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후련했다. 바늘로 손톱 밑을 톡 찔러 검붉은 핏방울이 비어져 나올 때 막혔던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처럼. 블루스는 절대 아픔을 아픔으로만 노래하지 않으니까. 


블루스는 시공의 경계를 넘어 지난 세기말 작은 트레일러 안으로 나를 데려갔다. 트레일러 안에는 버리고 버린 뒤, 추리고 추린 후 남았던 소유 중 끝까지 살아남았던 내 노트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결국 내게 남은 한 줌의 갈망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블루스를 들으며 쓰지 못하고 있던 나 자신을 비로소 용서한다. 때로는 가만히 멈추고 잠잠히 있을 수 있는 거라고. 어쩌면 이런 멈춤의 시간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진정 원하는 걸 하기 위해. 


기타 위에서 외롭게 튕겨지는 선율이 한동안 차가웠던 심장을 어루만진다. 


로이 부캐넌(Roy Buchanan), 머디 워터스(Muddy Waters)의 앨범


매거진의 이전글 무심한 눈길에 사로잡혀 본 사람은 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