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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Aug 08. 2020

무심한 눈길에 사로잡혀 본 사람은 안다

아름다움의 완성은 시선

무심한 눈길에 사로잡혀 본 사람은 안다. 달아나기 위해 애를 써도 그 시간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가늘고 긴 손가락 사이에서 뽀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녀는 서두르지 않고 담배를 천천히 입가로 가져가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 그녀의 몸속을 한 바퀴 더듬고 나왔을 연기를 밖으로 천천히 내뿜는 일련의 동작이 오랜 단련된 우아한 기교라 여기면서도, 한편 너무 자연스러워 그녀와 담배가 본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매끄럽게 이어지는 그녀의 몸짓은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연주 같다. 그녀의 입술은 얇고 보드란 나비 날개. 조그맣게 오므리며 파르르 떨 때, 담배가 되어 그 입술에 닿아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조여왔다. 


플래티넘 골드 빛 머리카락을 하나로 단정하게 묶고, 검은 스커트 정장을 입은 그녀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다. 매끄러운 살결은 젊은 기운과 에너지를 발산하는데 그녀의 시선은 반대로 무념의 경지를 보여준다. 육체가 뿜어내는 싱그러운 매력과 대조적으로, 그녀의 시선은 그 무엇과도 무연해 보인다. 


문득 바람이 불었다. 그녀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그녀의 향기를 실어 내 코끝에 전한다. 여성스럽지만 전혀 무겁지 않은 향. 확 끌어당기면서도 가까이 갈 수 없어 감질나게 하는 아기자기하게 간드러진 향기를 맡으니, 아무런 장식도 없는 검은 스커트 정장에 핑크색 리본이 길게 드리워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 향기에 끌려온 걸까? 그녀 맞은편에는 세 남자가 앉아 있다. 양복을 입은 차림이나 생김이 몰개성 해, 셋이 하나 같고, 하나가 셋 같은 그런 남자들. 한 사람의 입이 닫히면 다른 누군가의 입이 열리며, 여자에게 무언가를 끊임없이 얘기하고 있다. 그녀의 관심이나 시선을 끌지 못한 채.  


살면서 수도 없이 많은 미인들을 보았음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여자’ 하면 오래전 우연히 마주쳤던 그녀가 떠오른다. 조막 만한 얼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큰 키는 아니지만 늘씬한 몸매. 분명 ‘미인’으로서의 조건들을 꽤 갖추었지만, 그 생김만으로는 분명 빼어난 미인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이목구비나 인상이 지나치게 흐릿했다. 그럼에도 '아름다움'이라는 단어와 함께 그녀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그녀의 ‘무심한 눈길’ 때문이 아닐까.


다른 시간의 결을, 다른 템포의 시간을 살고 있는 자들의 시선. 이 세상에 몸이 놓여있지만 이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 이들. 끊임없이 매혹을 던지고 또 많은 이들이 그 매혹에 걸려들어 속을 태우며 조바심치지만, 정작 자신은 그렇다는 사실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다른 일체의 어떤 생각도 떠올리지 못하도록 상대를 꽁꽁 묶어 넣고는, 정작 자신은 아무런 생각 없이 멍하니 저 먼 곳을 바라보는,  

무심한 눈길. 


그 시선에 사로잡혀 본 사람만 안다. 30년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공간을 수없이 옮겼어도, 여전히 아름다움을 추억하며 그녀를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는 걸. 그리고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가 보고 있었을 그 무엇에 대한 동경을 영원히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오래 전 그녀의 사진은 찍을 수 없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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