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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Aug 16. 2020

내 꿈을 덮어버린 남의 꿈

설탕처럼 눈부시게 하얗고 달콤하지만 치명적인

하얀 설탕 가루를 보면 우습게도 피아노가 생각난다. 쩔쩔매며 건반을 두드리고 있을 때, 옆에서 하얀 설탕 가루가 솔솔 뿌려진 토마토 슬라이스를 입에 넣고 아삭아삭 씹었던 선생님과 함께. 음대 교수였던 그녀는 레슨 시간에 과일이나 음료를 주는 대로 받지 않고 설탕을 뿌린 토마토 슬라이스만 달라고 주문했다. 그녀가 가르쳐준 스킬이나 곡을 이해하는 방법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붉은 토마토 위에 뿌려진 하얀 설탕가루만은 또렷이 기억난다.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건 다섯 살 때부터였다.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 것도. 피아노 연습을 다섯 번 해야 완성할 수 있는 '바를 정(正)'자를 한 번 치고 통째로 그렸고, 그것이 생애 첫 거짓말이 되었다. 피아노 자체가 싫었던 건 아니지만, 똑같은 악보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반복하는 게 싫었다. 피아노를 배우지 못했던 엄마는 우아하게 피아노를 치는 삶을 부러워했고, 엄마의 꿈을 깰 수 없던 나는 ‘바를 정’ 자를 '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계속 그려나갔다. 


여섯 살 때 처음 콩쿠르를 나가기 이틀 전, 피아노 선생님이 집에서 연습을 잘하고 있는지 보겠다고 불쑥 가정방문을 했다. 학원에서 내가 피아노를 곧잘 쳤기에 선생님은 내가 집에서 연습을 잘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가 깜짝 놀라 돌아갔다. 당시 우리 집에는 피아노가 없었던 것이다. 대신 작은 장난감 피아노가 한 대 있었고, 그 장난감은 너무 작아서 왼손과 오른손을 동시에 연습할 수 없었다. 장난감 피아노로 한 손씩 번갈아 연습하고도 콩쿠르에서 상을 받았다. 



한 번은 콩쿠르에서 연주 도중 외웠던 악보를 까맣게 잊어버린 일이 있다. 결국 곡을 마치지 못하고 피아노에서 내려왔다. 콩쿠르가 끝나고 등수 발표 때, 비록 연주를 도중에 멈춰 아쉬웠지만 곡을 충분히 이해하고 감정을 넣어 연주했기에 내게 1등 없는 2등을 수여한다고 심사위원이 말했다. 덕분에 엄마는 내게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고 믿고 무리를 해서 음대 교수에게 레슨을 받게 하기 시작했다. 레슨비가 늘어나니 연습해야 양도 늘었고, 따라서 ‘바를 정’ 자 거짓말도 늘어났다. 


기쁨 없이 끌려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중학교 때 대학 입시를 핑계 대며 피아노를 때려치웠다. 그 뒤로 피아노에는 손도 대지 않는다. 심지어 음악회를 가도 피아노 독주회는 피한다. 내 꿈을 찾기 전에 남의 꿈을 덧입는 건 그래서 불행하다. 엄마의 꿈으로 덧칠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매일 피아노를 연주하는 삶을 살 수 있었을지 모르니까. 


붉은 토마토 슬라이스 위에 뿌려진 하얀 설탕가루처럼 내 꿈을 덮어버린 남의 꿈. 

눈부시게 하얗고 달콤하지만 치명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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