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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Apr 16. 2020

짜장면과 돈가스의 세계, 그리고 발버둥

애써 버둥거려봐야 기스면과 함박스텍에 도달할 뿐이지만

통계를 확인한 적은 없지만, 짜장면과 돈가스는 분명 한국인의 대표적인 외식 품목이다. 그런데 나는 짜장면과 돈가스를 먹지 않는다. 


열 살 무렵, 사회 보던 모습

돈가스에 대한 아픈 기억은 열 살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전교생 앞에서 사회를 보았다. 오전 행사를 멋지게 마치고  오후 행사 전에 간단히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일행이 모두 돈가스를 시켰고, 내가 메뉴를 보고 있는 사이 이미 돈가스로 주문은 통일되었다. 통일한 주문 덕인지 빠르게 서빙된 돈가스를 맛도 느낄 새 없이 허겁지겁 먹었다. 한복 치마 말기 부분을 단단히 졸라매 답답하고 불편한 데다 급히 먹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날 단단히 체하고 말았다.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할 만큼 호되게 앓았다. 그 후로는 돈가스를 입에 대지 않게 되었고, 어쩌다 먹은 날은 반드시 체했다. 돈가스의 저주에서 풀려 나는 데 무려 20여 년이 걸렸다. 이제 돈가스를 체하지 않고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좋아하지 않는다. '주문 통일’에 대한 체기 역시 그때 생겼던 것 같다. 



주문 통일은 중국집에서도 자주 일어난다. 식구들이 모두 짜장면으로 주문을 통일할 때, 나 혼자 기스면을 골랐다. 사실 기스면이 지쓰미엔(鸡丝面)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최근 일이다. 짜장면 대신 기스면을 시켰던 어릴 적 나는 중국어를 몰랐고, 훗날 중국에서 오래 살게 될 거라는 사실도, 기스면이 닭고기 육수에 면을 말아 찢은 닭살을 얹어 먹는 요리라는 사실도 몰랐다. 어쩌면 내가 잘 모르는 존재라는 사실이 기스면을 선택하게 한 가장 큰 이유였는지 모른다. 


짜장면은 너무 흔했고 짬뽕은 어린 내게 너무 매웠다. 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시킬 수 있는 주식의 메뉴는 결국 기스면 밖에 남지 않았다. 기스면, 중국어 발음(지쓰미엔)도 한국어 발음(계사면)도 아닌 이상한 조합의 단어. 그 이국적인 발음이 아마도 어린 내가 별 맛도 없는 기스면을 늘 고르게 유혹했던 모양이다. 


돌아보면 우습지만, 나는 짜장면과 돈가스의 세계, 주문 통일의 세계에서 벗어나 보려고 발버둥 치며 살았다. 남들과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다르고 싶었다. 그렇게 애써 버둥거려 봐야 겨우 기스면이나 ‘함박스텍’ ‘비후가스' 정도에 도달할 뿐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짜장면과 돈가스에 머물지 않으려 버둥거리던 젊은 날의 내가 좋다. 지금은 돈가스도 짜장면도 잘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지만 여전히 내 손으로 이 둘을 선택하는 일은 없다. 달아나려고 발버둥 치던 젊은 날의 나 자신에 대한 예의 같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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