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박물관
가을
-함민복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중국은 어딜 가나 크고 사람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주말이나 휴일에 유명한 관광지를 방문한다는 건 사람에 치일 각오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이 많이 모일만한 곳을 다닐 때는 평일 오전을 주로 이용한다. 난징동루(南京东路) 보행자 거리를 천천히 돌아보며 걷다가 상하이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런민광장(人民广场)까지 왔다. 이곳은 원래 경마장이던 곳을 북반부를 런민공원으로 그리고 남반부를 런민광장으로 새롭게 조성한 곳으로, 정치, 문화 관련 주요 건물들이 모두 런민광장을 중심으로 모여 있다.
모든 것을 끈적끈적하게 녹이고 휘어지게 만들던 강한 여름 볕 대신 어느새 따사롭고 보송보송한 가을볕이 피부에 내려앉는다. 사계절 중 일광욕에 가장 좋다는 가을볕. 더구나 식물에게도 보약이 된다는 오전의 햇빛. 길게 늘어뜨린 그 나른한 빛에 홀려 빛을 따라 걷고 있었다. 빛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듯 청명하고 쾌청한 가을 하늘. 빛을 따라 걷다 보니 런민광장 남쪽에 위치한 상하이박물관에 도착했다.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 지붕의 상하이박물관은 베이징, 시안, 난징과 더불어 중국 4대 박물관 중 하나로 도자기, 화폐, 서화, 옥기 등 진귀한 물건들을 12만 점 이상 보유하고 있다. 여기까지 온 김에 유명하다는 상하이박물관의 전시를 봐야 하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다, 가을 햇빛에 매료된 나는 도저히 실내로 들어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박물관 앞 계단에 걸터앉아 온몸을 빨래 널 듯 무방비 상태로 널어놓고, 가을 햇살이 온몸 구석구석을 간질이는 것을 눈을 감고 만끽한다. 햇빛을 너무 사랑해 자신의 그림자마저 싫어한다는 고추처럼, 내 얼굴도 점점 붉게 달아오른다. 이따금 눈꺼풀을 뚫고 아지랑이처럼 넘실거리는 햇빛을 보기 위해 눈을 뜨지만, 시리도록 부신 빛에 다시 눈을 감는다.
어느 순간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꿈결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꿈에서 깨어나듯 눈을 비비고 보니 사람들이 박물관 앞에 줄을 지어 서 있다. 긴 줄은 아니었지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서 웅성대는 사람들의 모습에 잠시 호기심이 일었다. 마침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의 특별기획전이 전시되고 있었다. 인상파라면 ‘빛의 화가’들이 아닌가. 빛에 완전히 매료된 지금이 바로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감상하기에 적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계획에 없던 박물관 관람을 서둘렀다.
모네, 시슬레, 피사로 등 인상파 화가들의 심도 깊은 풍경화들이 먼저 전시되어 있었다. 빛이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남프랑스. 쏟아지는 찬란한 빛 아래 아무렇게나 카메라를 들이대도 아름다운 풍경사진이 되고 마는 남프랑스의 그 아름다운 풍경의 분위기가 그림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의 인상은, 심지어 거센 폭풍우를 그린 그림마저도 고통을 전혀 느낄 수 없고,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 내 손안에 카메라가 들려 있다면 줌인(zoom in)해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인다. 너무 아름답고 빛나기만 해 현실감이 없기 때문일까. 내 마음을 읽었는지 그림은 풍경화 대신 인물화와 정물화로 바뀌면서 카메라가 줌인해 들어왔다. 하지만 바로 눈 앞에서 존재하듯 가까이 보고 있는데도 가깝게 느껴지질 않는다. 작은 잡티 하나까지 완벽하게 제거한 포토샵 처리된 사진을 보듯, 그림 속 인물은 그저 평온하고 아름답기만 하다. 저 사람에게도 더러운 욕망이, 지울 수 없는 핏빛의 죄가, 씻을 수 없는 상처와 후회가, 쓰디쓴 고뇌가 분명 있을 텐데. 조리개를 열어 빛의 양을 늘릴 때 화사한 사진을 얻듯이, 찬란한 빛 아래서 그 모든 얼룩들은 깨끗이 사라지고 오직 지극한 아름다움만 화폭에 남았다. 죄와 허물, 그리고 그림자마저 빛 가운데 던져지자, 그저 찬란하게 빛날 뿐이다.
저건 다 그리지도 않은 거잖아! 그림이 걸려 있는 벽의 벽지가 훨씬 더 완성도가 있어 보인다.
모네가 <인상, 해돋이>라는 작품을 처음 전시했을 때, 당시 비평가들은 혹평을 했다. 나와 남을 가르고, 이것과 저것을 분명하게 가르는 걸 좋아하는 세상 사람들 눈에 경계가 모두 사라져 버린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은 분명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뚜렷한 윤곽과 형태, 그리고 고유한 색을 바라던 사람들 눈에 빛에 의해 번지고 섞여 버린 인상파의 그림은 기술 부족이거나 반란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인상파 화가들만큼 사랑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이들도 없을 것이다. 사랑에 빠질 때, 나 자신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오직 상대방에 의해 비친 내 모습만 바라볼 뿐이다. 사물이나 인물의 뚜렷한 윤곽이나 고유한 색이란 건 의미가 없다. 오직 빛에 의해 시시각각 변하는, 빛에 의해 반사되는 빛깔만 중요하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 자신이 ‘나’라는 자아를 버리고 빛 앞에 무릎을 꿇은 마당에, 사물과 인물의 고유한 색과 형태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상’이란 이름이 내포하듯 그저 빛이라는 외부 자극으로 인해 시각적으로 받은 느낌을 포착하는 것만이 의미가 있다.
'사랑하는 그대'들의 공통적인 특성은 아마 변덕이 아닐까. 빛의 변덕으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그 빛깔들을 화폭에 담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빠른 스피드가 요구된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릴, 가장 찬란한 그 한 ‘순간’을 포착해야 하니. ‘지금’이라는 이 짧은 찰나의 한 순간을 영원 속에 꼭 붙들어 놓는 일에 인상파 화가들은 감히 도전한 것이다. 밤이 되면서 빛이 점점 스러지듯,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사랑에 빠지는 그 황홀한 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짧게는 몇 초 만에도 사라진다. 인상파 화가들이 ‘순간’을 포착하려는 노력이 바로 그런 황홀의 순간을 영원의 경지로, 불멸의 자리로 끌어올리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순간순간을 붙잡아 두기 위해 애를 썼던 인상파 화가들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현재를 충만하고 충실하게 살던 소수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어차피 그림을 보면서 ‘감동’ 내지 ‘충격’을 받는 것도 고작 2분 안에, 즉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니, 인상파 화가들이야 말로 그림의 ‘순간성’이란 속성을 제대로 파악한 사람들인 것이다.
왜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느냐고, 왜 허물이나 오점이 없느냐고, 왜 화가의 고뇌가 배제되었냐고 인상파 화가에게 묻는 건 결국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사랑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모든 고통과 고뇌, 허물과 오점이 사라지는 지극히 찬란하고 아름다운 그 ‘순간’을. 금방 스러질 것이 아쉬워 어떻게든 그 순간을 붙잡아 영원히 기억하고픈 그 간절한 마음을.
눈앞에 아른거리는 강렬한 빛의 인상을 그대로 담고 박물관 밖으로 나왔다. 길게 늘어져 있던 빛이 조금 짧아지고 더 밝아졌다. 따사로운 햇빛을 받고 서 있자니 광합성을 하는 식물처럼 싱그러운 생기가 온몸에 활력을 더하고 평온한 행복감을 준다. 바로 '지금 여기’의 행복을 인상파 화가들처럼 화폭에 담는 대신, 시야에 가득 담아 기억의 창고에 잘 넣어둔다. 영원히 꺼내보며 기억하기 위해.
따스한 가을 햇빛이 점점 짧아진다. 빛 아래 모든 허물과 죄가 소멸되고 그 그림자마저 찬란하게 빛난다. 가을이 그렇게 익어가고 있다.
<인상주의(Impressionism)>
미술에서 시작해 음악, 문학 분야까지 퍼져나감. 인상주의 미술은 공상적인 표현기법을 포함한 모든 전통적인 회화기법을 거부하고 색채, 색조, 질감 자체에 관심을 둔다. 인상주의를 추구한 화가들을 인상파라고 하는데, 이들은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고, 색채나 색조의 순간적 효과를 이용해 눈에 보이는 세계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려 함.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는 모네, 마네, 피사로, 르누아르, 드가, 세잔, 고갱, 고흐 등. 인상파는 밝은 색채를 사용하면서 외계의 사물을, 그 존재감에 있어서 보다 많은 빛을 받고 공기에 둘러싸인 인상에서 표현함.
<상하이박물관(Shanghai Museum)>
1993년에 시공하여 3년 동안 건설되어 완공. 원형 지붕 위에 아치 모양의 활선을 추가해 전체 건물이 중국 고대 청동기 그릇 모양 같다. 박물관 내에는 청동기, 도자기 및 서화들이 소장되어 있다. 청동기는 주로 강남 몇몇 수집가의 일부 소장품과 1930년대 이후에 발견한 것으로 유명한 다커딩(大可鼎) 등이다. 도자기는 강남의 진품 자기가 대부분이며 서화는 강남의 서화가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 외 화폐와 옥기 등 옛 물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