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지도 열지도 못한 입술이 바르르 떨린다
침묵 바이러스
-김소연
나는 말비듬이 떨어진 당신의 어깨를 털어주었다. 당신은 말들을 두 손 가득 담아 내 몸에 뿌려주었다. 눈을 맞은 나무처럼 꼿꼿이, 이 거리에 함께 서 있던 잠깐 동안의 일이었다.
말을 상자에 담아 당신에게 건넸을 때, 당신은 다이얼을 돌려가며 주파수를 잡으려 애를 썼다. 라디오 앞에 귀를 내어놓은 애청자처럼, 나는 당신의 사연을 읽어주는 DJ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우리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누구도 말하려 하지 않았을 뿐. 모두가 몸져 누웠을 뿐.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해진 체벌이었을 수도 있겠다. 죄를 입증하는 것보다 결백을 입증하는 데에 말이 더 무력한 탓일 수도 있겠다.
사람들은 발가벗은 몸으로 거리에 서 있었다. 줄기만 남은 담쟁이들조차 시멘트벽을 부둥켜안고 말없이 열렬히 침묵했다. 그럴 땐 태양조차 꿈을 꾸고 있었으리라. 백만 킬로와트 전력으로도 환히 밝혀질 리 없는 순백의 꿈이거나 밝혀서는 아니될 알몸의 꿈. 매초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꿈. 같은 자리에 오래 서 있던 사람들이 햇빛 받은 나무처럼 온몸이 쑥쑥 크는 거신증 같은 꿈.
벌을 선 채로 우리는 꿈속으로 들어가길 갈구했다. 돌멩이와 돌멩이처럼 조개껍질과 조개껍질처럼 서로의 꿈속으로 들어가 사지를 포갠 채 말을 대신하기를. 당신이 듣고 싶은 한 마디가 입에서 나오질 않는다. 할 말을 하지 않아서 나는 신열을 앓고, 당신에게 가는 버스는 끊기고, 막차를 놓친 사람들과 함께 이 겨울을 받아내며 나는 서서히 얼어간다. 눈은 쌓여 어깨가 버겁다. 막차가 떠난 밤거리는 말의 끝자리와 같았다. 첫말과 끝말의 그 사이,
귀가 백만 개의 잎사귀로 태어나는 새벽, 손이 백 만개의 날개로 퍼득대며 날아오르는 새벽, 당신이 쏟아낸 말들이 기적처럼 하얗게 쏟아진다. 제대로 된 자세로 몰매를 맞아보려고 손을 뻗어 라디오를 끈다.
수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고, 누군가는 그 말들을 열심히 퍼 날랐다. 방향을 모르는 산탄. 말 한마디를 쏘면 깨알 같은 탄알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산탄에 맞고 쓰러져 신음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말이 칼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데, 칼은 한 번에 하나의 대상을 베어낼 뿐 이렇게 무차별 사격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산탄에 여기저기 맞은 상처를 핥으며 입을 다물었다. 말이 두려웠다.
침묵이 잠시 위로가 되었지만, 그마저도 안전한 건 아니었다. 때로는 침묵이 상처를 주기도 한다. 아프든 말든, 울든 말든, 홀로 고독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침묵이 가슴을 멍들이기도 한다. 말이 산탄이라면 침묵은 저주파 음파 병기 같다.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아 자신이 공격받는 줄도 모르지만, 어느새 고막과 뇌에 손상을 입게 된다는 무서운 무기.
말이 무서워 입을 닫았는데, 어쩌면 나의 침묵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을지 모른다니. 닫지도 열지도 못한 입술이 하루 종일 바르르 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