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안다: 낯설게 하기

상하이 와이탄 미술관 (Rockbund Art Museum)

by 윤소희

11 안다: 낯설게 하기

@상하이 와이탄 미술관 (Rockbund Art Museum)




포옹


- 김행숙



볼 수 없는 것이 될 때까지 가까이. 나는 검정입니까? 너는 검정에 매우 가깝습니다


너를 볼 수 없을 때까지 가까이. 파도를 덮는 파도처럼 부서지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우리는 무슨 사이입니까?


영영 볼 수 없는 연인이 될 때까지


교차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침묵을 이루는 두 개의 입술처럼. 곧 벌어질 시간의 아가리처럼.




2층 난간에 힘겹게 매달려 있는 줄무늬 파자마의 대머리 노인. 바닥에는 슬리퍼 두 짝이 나뒹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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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식탁 위에는 접시와 컵들, 촛대 등이 경계에 몸을 걸치고 아슬아슬 서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고 맛있는 냄새를 솔솔 풍기는 음식은 온데간데없고, 텅 빈 접시들이 공허하다. 반쪽은 식탁에 걸치고, 반쪽은 허공에 몸을 날리는 식기들을 바라보며, 숨마저 멈춘 채 도저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혹여 미세한 균형이 틀어져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는 접시를 보게 될까 봐. 내 영혼의 반쪽은 잘 붙어 있는가? 전시회를 앞두고 접착제를 한 번 더 발라 혹시 있을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하는 아티스트의 마음처럼, 나 역시 내 영혼의 반쪽에 접착제를 발라야 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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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영국 건축가에 의해 지어졌다는 미술관은 좁고 길쭉한 몸으로 튀지 않고 다소곳하게 서 있었지만, 그래도 시선을 끄는 어떤 '낯선' 분위기가 있다. 미술관 문이 활짝 열리자 나는 이미 '낯선' 세계에 들어와 있다.



와이탄 1.jpg 상하이 와이탄 미술관 (Rockbund Art Museum)


일상적 인식의 틀을 깨고 형식을 난해하게 해서, 조금이라도 더 '낯설게'해 관객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더 붙들어두려는 작품들 사이를 무심한 듯 거닐고 있다. 하지만 주위가 낯설어질 때,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불편해서 꺼내지 않고 꼭꼭 감춰뒀던 생각들이 불쑥 튀어나온다. 난간에 힘겹게 매달려 있던 대머리 노인처럼 끈질기게 버티고 있던 생각들이.


낯익고 익숙한 이 모든 것들을 '낯설게' 바라본다면, 다른 앵글에서 새로운 모습을 자각할 수 있을까? 내가 아직까지 깨닫지 못한 본질에 정말 가 닿을 수 있는 걸까?


르네 마그리트의 '낯설게 하기' 7가지 기법:


1. 고립 - 사물을 원래 있던 곳에서 떼어내 엉뚱한 곳에 갖다 놓는 것.


남편이 나와 매일처럼 장문의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사물이 주는 사소한 자극과 세계에 대한 교감, 발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최근 새로 읽은 책의 어떤 문장이 자신을 매혹케 했는지, 남편의 글 중 어느 대목이 괜찮았고, 어느 대목은 이렇게 바꿔 써보면 좋겠다는 의견을 에버노트 공유 노트북에 차곡차곡 쌓아간다. 남편이 내게 시 한 편을 낭송해준다.


남편과 함께 문학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나눌 수 없는 것이 정말 내가 지후에게 끌리게 된 유일한 이유일까? 남편이 시를 쓰고, 함께 오페라와 발레 공연을 기쁘게 보러 간다면? 글을 쓰기 시작한 건 혹시 남편과의 거리를 나 스스로 넓히려고 했던 건 아니었을까.


아무도 나를 알아보는 이 없는 프라하의 거리를 홀로 걷는다. 남편과 아이들도 없고 지후도 없는, 아무도 내가 이솔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곳. 더 이상 이솔로 살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낯선 곳을 홀로 걷고 있다.


정말 '나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남편의 아내이자 준과 민의 엄마라는 가면 뒤에 숨어 있다가, 지후와 문장을 섞으며 내 안에 숨어 있던 나 자신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찾았다고 생각한 내 모습의 파편이 정말 진정한 나 자신인 걸까?



2. 변경 - 사물이 가진 성질 가운데 하나를 바꾸는 것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 저녁 약속이 있다고 외출한 남편이 달려간 그녀의 집. 문이 열리고 스르르 미끄러지듯 집 안으로 들어간 남편은 젊은 그녀를 끌어안고 길고도 깊은 키스를 나눈다.


나도 모르게 내 입술로 손이 갔다. 지난 6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남편은 매일 아침 내게 키스를 했다. 아주 소중한 아기를 다루듯 조심스럽고 정갈한 키스. 그런 남편이 열정적으로 누군가의 입술을 물고 빠는 모습을 본다는 건 확실히 당혹스럽다. 이 당혹감 뒤에 숨어 있는 건 분노나 질투일 수 있는가? 아니면 안도감 같은 것일까? 정말 이런 일이 있다면 내 마음은 편해질 수 있을 걸까? 이런 일을 정말 원하는 거야, 이솔?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 지후. 단 한 줄의 문장도 쓸 수 없는 지후.


상상할 수 없다. 문장이 없는, 시가 없는 그를 떠올릴 수 없다. 아니 떠올리고 싶지 않다. 문장을 제외한 큰 덩어리로 실재하는 그의 모습을, 나는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린다. 난 그저 문장을 보고, 문장을 듣고, 문장의 향기를 맡고, 문장을 맛보고, 문장을 만지고, 문장을 끌어안고 싶은 것일까? 문장밖에 존재하는 그가 혹시라도 내 인생에 깊이 들어와 뒤엉켜 버릴까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3. 잡종화 - 이질적 두 사물의 결합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낯선 지후의 집. 그의 식탁에서 아침을 차리고 있는 나. 식탁 위에 접시를 놓고 있는 나를 등 뒤에서 안는 지후.


생경한 이미지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어쩐지 한 지옥에서 다른 지옥으로의 이동처럼 느껴져 숨이 막힌다. 그의 삶과 일상으로 들어가는 것만은 끝내 거부한다면, 그것 역시 사랑인 걸까? 원치 않는 부분은 칼로 도려내 제거해 버리고, 원하는 것들만 남긴 ‘그'는 정말 ‘그’인가.



4. 크기의 변화


지후의 몸과 머리는 작아지고, 오직 두 손만 기형적으로 커져 있다.


유일하게 허락되었던 접촉점. 그 순간을 떠올리자 갑자기 내 손이 뜨거워진다. 손들의 애무. 입술과 혀 이상으로 서로를 핥으며 꺾고 긁으며 부비던 그 황홀한 열락. 다른 누구의 손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존재와 존재가 그렇게 만나는, 전면으로 부딪힐 때의 전율과 일치감은 다른 곳에서 재연될 수 없다. 가을이 되자 부쩍 차가워진 내 손이 온기를 미치도록 그리워한다.



5. 이상한 만남 - 평소에 만날 수 없는 사물을 나란히 이어 붙임.


전 남편과 지후가 마주쳤다.


어떤 이미지로든 전 남편이 떠오르자, 순간적으로 호흡이 멈추고 온몸이 굳어버렸다. 혹시라도 그들이 실제 삶 속에 이렇게 마주친다면, 지후는 그가 내 몸과 영혼을 찢어놓은 바로 ‘그놈'이라는 걸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을까? 내가 허공에 몸을 던지고, 내 뼈들이 부서지게 된 이유가 그에게 있음을 지후는 바로 알아볼 수 있을까? 분노와 살의를 느낄까? 언젠가 대답했던 대로 정말 그를 죽여줄 수 있을까? 아니 내가 지후에게 이별을 통보한다면, 지후 역시 ‘그놈'을 공감하며 그와 손을 잡는 건 아닐까?



6. 이미지의 중첩 - 두 사물을 하나의 이미지로 응축


기도하는 손.

두 사람이 실오라기 하나 없이,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서로를 온전하게 부둥켜안으며 천년을 버텨오며 응고된 어떤 화석처럼 '결합'되어 있다. 떼어놓는 순간, 그들은 '부서진다'!!

기도가 한 손 만으로 이뤄질 수 없듯이.


안다.jpg 즈지스와프 벡신스키 <1984_3a[2]> - '폼페이 화산의 화석'으로 오해.


지후와의 섹스를 상상해 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상상할 때마다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떤 쾌락의 절정이 아니라, 온전히 서로를 부둥켜안은 완벽하게 견고한 포옹이다. '빈틈' 없이 온전한 결합을 꿈꾸지만, 많은 것들을 제거하고 제한하는 그와의 만남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7. 패러독스 -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사물이 한 그림 안에 사이좋게 들어감


지후와 남편이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며 서서 환하게 웃고 있다. 두 사람 다 어깨동무를 하지 않은 손을 높이 들고 흔들며 내게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한다.


지후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남편과, 복잡한 심경으로 얼굴도 모르는 남편을 떠올릴 지후가 한 자리에 함께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그것도 피를 나눈 형제처럼, 삶을 나눈 친구처럼 다정하게. 눈이 부시다. 찬란하게 빛이 나는 그 둘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 양손을 다정하게 두 사람 어깨에 걸치고 싶다. 세 사람이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는 모습. 어째서 난 이런 걸 꿈꾸는 걸까?


머리가 어지럽다.

'낯선' 모습들이 머릿속에서 마구 헝클어지고 얽혀 들면서 나는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비가 올 듯 꾸물꾸물한 오후, 미술관 속 '낯선' 작품들 사이에서 난 다시 길을 잃는다.





<상하이 와이탄 미술관>


상하이 와이탄 지역에 위치한 미술관. 난징동루 역에서 도보로 10분.

1932년 영국인 건축가 Tug Wilson이 건축한 건물을 2007년 영국 국적의 건축가 David Chipperfield가 다시 재건해 지금의 미술관이 되었다.

3개월에 한 번 새로운 전시를 하며, 보통 Contemporary Art 전시를 많이 한다.


<르네 마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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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화가. 1927년 쉬르레알리즘 운동에 참가했고, 처음에는 키리코풍의 괴상한 물체나 인간끼리의 만남 등과 같은 풍경을 그렸다. 1936년경부터 이미 데페이스망보다도 고립된 물체 자체의 불가사의한 힘을 끄집어내는 듯한, 독특한 세계를 조밀하게 그리기 시작했고, 또한 말과 이미지를 애매한 관계에 둠으로서 양자의 괴리를 드러내 보이는 방향도 보여주었다. 전후의 팝 아트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즈지스와프 벡신스키>


(1929-2005) 판타지 예술가로 잘 알려진 폴란드의 화가이자 사진작가, 조각가. 바로크 또는 고딕 스타일의 작품을 주로 제작. 영화 <에일리어> 시리즈의 괴수 에일리언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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