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그가 또 살그머니 책 한 권을 놓고 갔다. 돌아보니 이미 그는 저만치 걸어가고 있다. 그가 놓고 간 책을 가만히 떠들어 본다. 역시 책 속에는 가끔 밑줄이 그어져 있거나 여백에 연필로 스케치한 그림이 보인다.
언제부턴가 그가 빌려준 책의 내용보다는 그가 남긴 선이나 그림, 메모 등에 눈길이 더 갔다. 다시 말해 그가 어떤 문장에 밑줄을 그었는지 보다는 그가 그 문장에 줄을 긋는 방식이나, 어떤 단어에 네모를 칠 때 연필로 선을 긋는 방식을 더 눈여겨보았다는 말이다. 밑줄이나 네모만큼 많지는 않지만 여백에 작게 스케치해 놓은 그림을 보는 것도 몹시 흥미로웠다. 그가 스케치를 하듯 그은 밑줄이나, 기억하고 싶은 단어에 그림을 그리듯 선을 둘러 사각형을 그려 넣는 방법은 내가 연필이나 볼펜으로 쓱 치는 밑줄과는 분명 달랐다. 그의 손길이 닿은 책을 읽다 보면, 연필이 종이와 닿을 때 내는 ‘쓱싹쓱싹’ 또는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그가 남긴 흔적들을 더듬다 보니 책이 저마다 가진 빛깔이 보였다. 이 책은 그 흔적들을 더듬어 읽어 간 기록이자 색깔 있는 독서의 흔적이다.
-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프롤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