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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May 02. 2020

소심한 토플리스의 추억

한 꺼풀의 껍질을 벗고

막 나이 마흔에 당도했을 때, 이제 인생의 본문이 끝났구나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새로운 악장이 시작된다는 설렘이 있었다. 그런 설렘으로 대여섯 살 아이들을 떼어 놓고 14년 만에 만난 친구와 단 둘이 여행을 떠났다. 아마 혼자였다면 찾아가 보지 못했을, 나폴레옹의 고향 코르시카 섬으로.


싱글인 데다 자유분방한 친구는 스스럼없이 비키니 브라를 벗어던지며 토플리스가 되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풍만한 가슴을 드러내고 누워 있다가 갑자기 젊은 남자가 다가와 뭔가를 물어보는데도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다. 가슴을 드러내고도 거리낄 것 없이 당당하게 대화하는 친구가 내게는 낯설었다.  


만약 타의에 의해 벌거벗겨진다면? 아마도 그것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마저 짓밟히는 최대의 수치이자 모욕이 될 것이다. 일본군에게 끌려간 조선인 처녀들이 그랬고,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여성이 그랬다. 하나 같이 가장 괴로웠던 경험을 이야기하라면, 벌거벗겨지는 것이라고.


타의에 의해 드러난다면 수치와 모욕이 될 은밀한 곳을 스스로 드러낸다면 거기엔 오직 당당함과 자유, 그리고 아름다움이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가슴을 드러낼 수 있는 친구가 부러웠다.
 

그 누구도 아는 이 없는 코르시카 섬, 나는 인적이 드문 바닷가 구석을 찾아 망설이고 망설이다 비키니 브라의 끈을 풀었다. 소심한 토플리스. 뜨거운 태양과 시원한 바람이 내 가슴을 간질이는데 뭔가 막혀 있던 것이 ‘툭’하고 터져 나오는 듯했다. 그 누구 하나 보는 사람 없고, 반 줌도 안 되는 빈약한 가슴에는 누군가를 유혹할 성적 매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하지만 하늘이, 태양이, 그리고 바람이 따뜻한 시선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래 나는 스스로 나 자신을 드러내고 조용히 누웠다. 나를 덮고 있던 한 꺼풀의 껍질이 벗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 꺼풀 벗어던지는 자유의 매력을 알면서도 몇 년 새 나는 한층 더 소심해졌다. 매일 아침 샤워를 하기 위해 옷을 벗을 때, 일부러 거울에 뒷모습을 비춰 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허리 디스크 때문에 매일 뜨거운 열찜질을 달고 살다 입은 저온 화상으로 허리 전체가 얼룩덜룩해졌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용기를 내어 거울을 들여다본다. 핑크 빛 대신 똥 빛 일지라도 문양만은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닮았다. 이제 더 이상 비키니를 입을 일은 없겠다 생각했는데, 문득 허리 위에 흐드러지게 핀 아름다운 벚꽃을 드러내고 태양 아래 엎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다. 몸부림친 흔적과 상처에 따스한 햇볕이 가닿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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