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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May 02. 2020

부서진 장롱

흉터를 드러내는 일은 생각만큼 끔찍하지 않다

닫히지 않는 서랍이 생겼다. 아무리 힘을 주어 닫으려 해도 꿈쩍도 않는다. 몇 달 전부터 장롱의 서랍 하나가 매끄럽게 열리지 않더니, 기어이 5센티쯤 열린 채 부끄러운 속살을 드러냈다. 한두 달이 더 지나자 말썽이던 서랍이 완전히 부서져 버렸다. 여섯 개의 서랍 중 나머지 다섯 개가 멀쩡한 장롱을 버리는 대신, 부서진 서랍 하나만 뜯어냈다. 서랍 하나가 뜯겨 속을 드러낸 장롱은 흉물스러운 데가 있었지만 버리지 못했다.

 

너무 많은 것들이 쉽게 버려진다. 나 역시 많은 것들을 쉽게 버리던 사람이다. 하지만 어딘가 고장 나 보니까 부서지고 버려지는 것들의 슬픈 얼굴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허리 디스크 때문에 1년 가까이 꼼짝 못 하고 침대에 누워 지냈다. 그런 내가 가족들에게는 부서진 장롱처럼 불편했을 것이다.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 가족들은 매끄럽게 열리지 않는 서랍을 조심스럽게 열고 닫듯이 내게 세심하게 신경을 써주었다. 누워 지내는 기간이 길어지자, 가족들은 방에 누워 있는 나를 제외하고 할 일을 나눠 처리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넣지 않는 쓸모없는 서랍이 된 기분이었다. 허리 상태가 심하게 악화되었을 때는 속옷을 혼자 힘으로 갈아입을 수 없어, 아들아이의 도움을 구해야 했다. 부서진 장롱 대신 나 자신을 버리고 싶었다. 

 

하루는 그런 나 자신이 싫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누워있는데, 조심스럽게 나를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린이용으로 편집된 카프카의 <변신>이 손에 들려 있다. 아이는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를 보며 슬프다고 했다. 

“엄마는 엄마니까 그냥 좋아.”

아이가 가까이 다가오다 말고 멈칫한다. 

내가 안으면 엄마가 더 아프지?”

서랍을 아예 열지 않은 건 쓸모없어서가 아니라, 더 망가지고 다칠까 봐 조심하기 위한 것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지나갔다. 나는 아이의 팔을 끌어다 꼭 안아주었다. 

 

사실 그때 나는 허리만 망가진 게 아니었다. 마음까지 뒤틀려 보기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부서진 나 자신만 들여다보느라 나를 둘러싸고 있던 사랑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제야 오랫동안 덮어두었던 이불을 걷고 그 속에서 곪아가던 상처를 드러낼 용기가 조금 생겼다. 

 

부서진 장롱의 서랍이 뜯겨 나간 자리를 깨끗이 닦고 거기에 작은 화분 두 개를 놓았다. 뜯긴 자리의 흉터가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흉터를 드러내는 일이 생각했던 것만큼 끔찍하지는 않다. 창을 통해 흘러든 햇살이 작은 화분 속 여린 이파리에 닿아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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