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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Jun 19. 2020

'미운 오리 새끼'가 '미운 오리 아줌마'로 자란 후

'백조가 되지 못한 오리'가 아닌 그냥 '오리'로 살기

한동안 아이가 불안 증세를 보이기에 ‘HTP (House Tree Person)’ 해석을 친구에게 부탁했다. 학부 전공이 심리학이어서 HTP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는 있어도 실제 해석해 본 경험은 없으니 전문가인 친구에게 부탁한 것이다. 아이에게는 일종의 놀이처럼 느끼게 하기 위해,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다 같이 집, 나무, 사람을 그렸다. 덕분에 덤으로 나 자신을 조금 더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내가 그린 나무나 사람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소통을 몹시 갈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그런 갈망으로 글을 쓰고 있는 거겠지만, 갈망은 늘 갈망으로 끝났다. 소통을 갈구하며 열 손가락을 쭉 뻗어 보지만, 정작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다. 나를 드러내는 걸 두려워하는 것이다. 수많은 나뭇가지를 밖으로 애타게 뻗어보지만 겨울도 아닌데 나뭇잎을 모두 떨군 채 뿌리만 점점 더 땅속 깊숙이 뻗을 뿐이다. 글을 쓸 때 정작 쓰고 싶은 말은 못 쓰고 변죽만 울리거나, 최대한 내 색깔을 배제하고 밋밋하고 흐릿한 글을 쓰는 걸 봐도 알 수 있다. 


실제 사람과의 소통도 비슷하다. 누군가 연락을 주면 반가워하고 기쁘게 만나면서, 내가 먼저 연락을 하는 일은 없다. 그리워하는 친구들이 꽤 있음에도 상상 속에서만 안부를 기쁘게 주고받을 뿐, 먼저 손을 뻗지 못한다. 내게 남은 한 줌의 친구들은 그런 나를 알고 늘 먼저 손을 내밀어 주는 친구들 뿐이다. 심지어 페북 등 소셜미디어에서도 답글 외에 내가 먼저 댓글을 달거나 말을 거는 일은 없다. 쓰다 지우다만 반복하다 말아버린 적은 꽤 있지만. 글은 꽤 꼼꼼하게 읽는 편이지만 슬쩍 ‘좋아요’만 누르고 사라진다. 누군가에게는 별 것 아닌 말 한마디 거는 일, 댓글 한 줄 남기는 일이 내게는 여전히 두려운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어려서부터 '미운 오리’였다. 이유를 딱히 알 수 없는 미움을 늘 받았다. 중요한 건 미움에 반응하는 내 태도가 나이를 먹으며 달라졌다는 것이다. 


‘미운 오리 새끼' 시절, 남들이 미워하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 겨우 아홉 살 어린 나이에, ‘왕따’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에 왕따를 당했을 때도 상처 받지 않았다. ‘애들이 나를 몰라서 저러는 거야.’ 내면이 굳건했기에 그런 상황에서도 자존을 지킬 수 있었다. 어쩌면 미운 오리 새끼 마음속에 '사실 나는 백조일지도 몰라’하는 기대감이 한몫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사실 그녀는 백조였다’는 사건 따위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미운 오리 새끼’가 ‘미운 오리 아줌마’로 자라면서 점점 움츠러들게 되었다. 아주 작은 비난이나 가시 돋친 말에도 상처가 깊이 팬다. 그토록 소통을 갈구하면서 결국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아무와도 엮이고 싶지 않아 하는, 점점 움츠러드는 나만 남았다. 


정말 난 이상한 인간인 가봐. 
난 정말 재수 없는 인간인가?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아.


사실 나를 미워하는 건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는지 모른다. 스스로를 ‘백조가 되지 못한 오리’라고 여기고 있으니 사랑하려야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새끼 백조 (좌)와 새끼 오리 (우)


스스로를 미워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처음 한 일은 우습게 들리겠지만 오리와 백조 사진들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사진 속 새끼 오리가 귀여워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새끼 오리든 다 자란 오리든 백조랑 비교할 이유도 없지만, 비교한다 해도 그보다 결코 못나지 않았다. 오리는 오리로서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걸 발견하자 내가 진짜 오리도 아니면서 어떤 안도감이 들었다. 삶은 비유고, 내 삶 역시 한 편의 이야기니까. 


늙은 오리


오리 새끼가 백조가 되지 않고 오리로 자라준 것이 오히려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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